▲수용소 내에서는 서서히 편갈림이 생기고 친공과 반공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포로들에게 빨간 옷을 입혔다가 거부 투쟁이 발생했던 그 날 이후부터 수용소 안에서는 좌익 우익이 나뉘어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수용소 안에서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주도권을 잡으면 우익 수용소,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주도권을 잡으면 좌익수용소가 되었다. 내가 있던 76 포로수용소는 좌익이 가장 득세한 곳으로 유명했다.
수용소에서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죽였다. 이를 눈치 챈 우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좌익과 피할 수 없는 싸움이 계속돼 하룻밤에도 수십 명씩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제네바 포로협정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포로수용소 안으로 절대로 무기를 들고 들어오지 않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좌우익의 이전투구... 사람 죽어나간 포로 수용소76 수용소에서 처음 예배를 볼 때 교인들이 천명 이상씩 모이던 것이 좌익이 주도권을 잡으며 차츰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오십여 명, 신교 신자는 백여 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남은 신도들 중 한 사람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CIE '유엔민간공보교육처'에서 발행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책을 가지고 하는 강의를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서구와 일본, 미국과 남미 등 여러 나라의 제도와 생활 등을 배웠는데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사상을 전환 시키려는 세뇌 공작이라고 반대하며 이 교육을 거부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교육은 중도에 중지되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친공포로들이 국군 보초병과 말다툼을 하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보초가 총을 발사해 포로 몇 사람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 소요가 확산되자 미군들이 장갑차를 몰고 와 포로들을 전부 천막 속으로 들여보내고 진압에 나섰다.
내 동료 한 사람은 변소 안에서 대변을 보다 총에 맞았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피를 흘리는 그를 보고 "야 너 총 맞았어!" 했더니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는 정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숨졌다. 나는 몹시 애통했다. 그 후부터 수용소 안은 점점 소란해졌다.
나는 미국인 '보켈' 선교사의 말을 들으며 성경 공부도 했다. 그러는 동안 8월 하순경이 되었는데 드디어 새로운 옷이 나왔다. 우리는 다시 옷을 입었다. 의복이 다시 나오고 가을이 되자 인민군 복장을 하고 인민군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인민군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녔다.
9월 중순이 되었다. 보켈 선교사가 급히 전하길 신자들은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담요를 들고 갔더니 천주교 신자 오십여 명과 기독교 신자 백여 명이 모두 모였다. 우리는 그날 전격적으로 좌익인 76 수용소에서 우익인 82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가게 되었다. 나는 82 수용소에서 신자소대로 들어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 공부를 했는데 김건호 목사님의 사도행전 강의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다시 '유엔민간공보교육처'에서 가르치는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나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며 '민주주의란 다 옳은 말과 옳은 사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신자소대는 예수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여서 참 재미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예배를 보고 낮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엔 쉬며 자유 시간을 가졌다. 저녁에는 암거래 시장인 '사바사바' 시장으로 가곤 했는데 거기에는 서로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어 가서 주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는데 없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구두 밑창 쇠로 칼을 만들기도 하고 반지도 만들었으며, 심지어 수저도 만들었다. 옷이나 천도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뜨개질도 하였고 천막 끈으로 뜬 양말도 있었다. 나는 반지를 가지고 가서 양말로 바꿔 신기도 했다. 사바사바 시장의 물건들은 보면 볼수록 그 기술들이 놀랍기만 했다. 때때로 자유 담배가 지급되었지만 나는 담배를 안 피워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오징어로 바꿔 먹기도 했다.
가을이 되자 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데 때는 10월 하순경이 되었다. 나는 이북 우리 고향보다 '철이 매우 늦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고향에선 9월 하순이면 단풍이 들고 서리가 내려 9월 20일경이면 벼의 수확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수용소에 '리지웨이' 장군이 왔는데 나는 이 때 미군 장군을 처음 보았다. 여흥시간에 한국 아가씨와 사귀던 미군들이 아리랑을 마치 한국 사람이 부르는 것처럼 잘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우리 82 수용소와 81, 83, 74 수용소는 우익수용소였지만 76 수용소와 78, 77 수용소는 좌익 세력권 안에 있어서 매일 좌우익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 82 수용소에서는 좌익운동을 하면 그들을 색출해서 따로 가두고 감시를 하다 좌익 수용소에 넘겨주었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왔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모두 성탄 준비를 했다. 성탄절에는 밥을 곱이나 먹을 수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우리는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인사를 한 후 성탄예배를 드렸고 낮에도 대예배를 보았다.
벽보판에는 신문이 붙어 있는데 철원 평강 김화에서 전투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사상자의 수가 매일 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나는 전투소식을 보며 '언제 전쟁이 끝나 통일이 되어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고향을 그리워했다.
거제도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겨울이 되자 따뜻한 옷이 배급되어 우리들은 좋은 겨울옷을 입을 수 있었다. 나는 동료들과 '거제도는 겨울에 눈이 오나 안 오나?' 하는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거제도엔 눈이 안 온다'라고 했고 나도 '눈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2월초가 되자 거제도엔 눈이 많이 왔다. 우리는 그때서야 '한반도엔 어디나 눈이 오는구나'하고 신기한 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송반대 시위... "저는 이남에 남겠습니다"3월 1일이 다가오자 우리는 '기미년 3월 1일 정오'라는 삼일절 노래를 배웠다. 남한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운 노래다. 그리고 '전우가'를 비롯해서 많은 군가도 배우게 됐다. 3월 1일에는 처음으로 영내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판문점에서 정전회담 때 포로교환 문제가 큰 의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 포로 가운데에는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고 북송반대 시위를 크게 벌였다. 그날 나는 지붕 위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사다리를 딛고 내려오다 사다리가 넘어져 땅에 떨어졌다. 그때 가슴에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정신은 멀쩡하였지만 심장이 잠시 멎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위생병이 나를 흔들며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들이 또렷이 보이고 하는 말도 들을 수는 있었으나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몇 분이 지난 후 하늘이 노래지고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 때 위생병이 내 가슴을 두들겨주고 막 문지르니 심장이 움직이고 조금 후 내 호흡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그 때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