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 장군
박도
나는 그날 오후 연길 서점에서 산 중국조선민족 발자취 총서4 《결전》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모습을 처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호남인지 그 인물에 홀딱 반했다. 아울러 현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명맥이 끊어진 1930~40년대의 걸출한 독립전사들의 이름도 읽을 수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는 김일성·안길·최현·김일·서철, 제2로군에서는 최용건·리학복, 제3로군에서는 허형식·김책 등이 그들이다. 같은 책 263쪽에서는 김우종씨가 쓴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편에서는 혀형식 장군의 장엄한 최후도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연길에서 창춘으로 돌아온 뒤 지린, 서란, 화전, 반석을 거쳐 유하현 삼원포 일대의 항일유적을 답사했다. 가는 곳마다 한 세기가 지난 역사의 현장이라 그 원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옥수수·벼논·해바라기·통나무·초가집·기념비만 보고 그곳에서 헌작 재배 묵념하는 걸로 아픈 마음을 달랬다.
마지막 답사 여정으로 랴오닝성으로 입성하여 왕청문에서 양세봉 장군 석상을 뵙고 선양에서 9·18 기념탐과 삼시협정을 맺은 선양공안국을 보고 이튿날인 1999년 8월 11일에 귀국했다.
순수한 인민의 지도자나는 중국에서 귀국 후 <항일유적답사기>를 집필하던 중, 어느 날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서 독립기념관 발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7집에서 '許亨植 硏究(허형식 연구)'라는 논문을 발견했다. 독립기념관 연구사 장세윤 박사가 쓴 논문으로 단숨에 읽고는 복사해 다시 읽었다. 그러자 허형식 장군에 대한 흠모의 마음이 불같이 일었다.
나는 곧장 그 무렵 성균관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인 장세윤 박사를 찾아갔다. 내가 허형식 장군과 동향이라고 하자 장 박사는 초면인데도 마치 십 년 지기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국내에 처음으로 <허형식 연구>를 발표한 장 박사가 허형식을 주목했던 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대부분 북한 출신인데 견주어 남한 출신이다.둘째,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이다.셋째, 항일연군에서 정치 이론과 사상, 대원 교육과 전략전술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넷째, 1940년대 초 최용권 김책 김일성 등과 거의 대등한 고위 간부로 활동했다.다섯째, 1942년 8월 북만주에서 전사할 때까지 항쟁할 만큼 철저한 적극 무장 투쟁론자였다.특히 장 박사가 허형식 장군을 높이 평가하는 점은 1940년대 초 무렵 다른 항일연군 지도자들은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갔으나, 허형식 장군은 단 한 번도 국경을 넘나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허형식 장군은 끝까지 만주의 백성들을 지키다가 위만군 토벌군에게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로, 이는 독립전사의 열정과 순수성에서 그 누구보다 앞선 지도자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