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브(Tube)처럼 생긴 런던의 지하철(Undergrond)
정기석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리는 순간, 졸지에 항공사 고객에서 일개 배낭여행자 신세로 전락했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온통 두려운 미지의 세계다. 자칫 차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내리기라도 하면 국제미아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현대는 도처에 사고나 사건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사회다. 하지만 런던 현지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다.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마치 적진에 뛰어든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온갖 국적과 인종이 뒤섞인 혼잡한 공항 로비로 들어서자 걱정과 불안은 증폭했다.
"뭘 타는 게 좋지? 몇 번 터미널로 가야 차를 탈 수 있지? 차표는 얼마 짜리를, 어디서 사야 하지? 자동판매기에서 차표를 사야 하나, 이런 젠장, 어떻게. 현금으로 사야 하나, 카드로 사나? 카드로 산다면 비밀번호는 몇 자리나 눌러야 하나?"심장박동과 말과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점점 빨라졌다. 아내도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사전 정보 조사나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먼저 다녀온 여행 선배들이 직접 제작한 각 도시의 여행지도롤 따로 구했다. 지도를 방바닥에 펴놓고 전시 적진침투 작전을 구상하듯 도상훈련도 수시로 했다. 예정행로 또는 희망동선을 몇 가지 경우의 수로 설계해 머리에도 입력해두었다. 구글지도 검색으로 최적의 지름길을 찾아가는 기술도 익혔다. 하루에 9900원이나 지불해야 하는 무제한 데이터 사용 인터넷로밍 서비스까지 신청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근심, 걱정, 불안, 초조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아무리 지도를 쳐다보고 인터넷 지도를 검색해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지도가, 인터넷이 아무리 열심히 지명을 알려주고 가는 길을 설명해도 마찬가지였다. 지도의 동서남북과 현지의 동서남북은 느낌이 다르다. 동이 서 같고 남이 북 같다. 설사 동네 이름을 숙지한다 해도 그게 어디쯤 붙어 있는 땅인지 분간이 돼야 제 발로 찾아갈 것 아닌가.
지명마다 금시초문인 이국의 낮선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 한국처럼 '빨리, 빨리' 연결되지 않는 인터넷, 무엇보다 나의 철저하지 않은 방향 감각과 공간지각 능력을 좀처럼 신뢰할 수없었다. 믿을 만한 방법, 최후의 비빌 언덕은 단 하나였다.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
런던 지하철역에는 '서브웨이'도 '튜브'도 없다소용 없는 지도를 그만 가방에 접어넣고 히드로공항 인포메이션 센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안내원 아주머니에게 숙소 약도를 들이밀며 이렇게 매달렸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여기, 켄싱턴 클로즈 호텔을 찾아가려는데, 최선의 길을 좀 가르쳐 주세요.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런던을 잘 모르는 한국인인 나를 좀 구원해주세요. 플리즈, 헬프 미, 플리즈." 안내원 아줌마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한국인을 자주 접해본 표정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주저없이 지하철을 타고 갈 것을 권했다. 택시는 비싸고 버스는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믿음이 갔다.
"일단 파란색 피카딜리 라인을 타고 얼코트 역에 내려서 녹색 디스트릭트 라인으로 갈아타라. 한 정거장 더 가서 하이스트릿 켄싱턴 역에 내리면 된다. 역에서 10분쯤 걸어가면 호텔이 보일 것이다. 이게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다." 다시 인터넷을 뒤져보니 구글지도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같은 방법이었다. 체온이 있는 사람의 말은 믿음이 가도, 차가운 인터넷 기계어는 선뜻 믿지 못했을 뿐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티켓구매의 고민까지 단번에 해결했다. 티켓 자동발매기를 상대로 고된 시험에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동발매기라는 기계에서 카드를 충전할 자신도, 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런던에 여행 오면 으레 선불제 오이스터(Oyster) 교통카드부터 구입한다고 하던데, 일단 편도 티켓을 끊었다. 첫날은 숙소 밖에 더 돌아다닐 일도 없을 테니.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것도 하루종일 돌아다닐 다음 날 1인당 9파운드짜리 1일권을 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봐도 지하철역이 눈에 띄지 않았다. 런던의 지하철은 한국처럼 서브웨이(Subway)가 아니라 '튜브(Tube)'로 불린다는 사실,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라는 정도는 공부하고 온 터. 하지만 공항 로비를 아무리 둘러봐도 '튜브'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안내원 아줌마, 아무리 찾아도 지하철역이 안 보이는데요."런던 아줌마는 참 딱 하다는듯 손가락으로 바로 눈앞의 안내판을 가리켰다. '언더그라운드(Undergrond)'. 그게 지하보도나 지하층이 아니라 지하철역이란다. 달랑 그렇게만 써있다. '튜브'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써 있지 않다.
'런더너'들은 지하로 2층으로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