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중대에 배속된 군사진사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자신의 개인 사진기로 찍은 학살사진. 1969년 11월 12일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의 미라이 학살 특종보도를 계기로 그해 11월 20일 클리블랜드에서 발행되는 <플레인 딜러>라는 일간지에 처음 게재되고 <라이프(Life)>지에 실려 '더러운 전쟁'이라는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김당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에 맞춰 취재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베트남전 관련 자료와 책자를 읽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펴낸 공식문헌과 통계, 그리고 한국군이 수행한 민사심리전에 관한 학위논문, 최근까지 <한겨레>에 연재된 '박태균의 베트남전쟁'(1~34회) 등이다.
참전군인들의 무용담으로만 전해온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처음 공론의 장으로 나온 것은 1999년부터다. 당시 호찌민대 역사학과(석사과정) 학생이자 <한겨레21>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씨가 처음 발굴해 전했다. <한겨레21> 고경태 기자는 구수정 박사의 과거사 발굴작업을 이어받아, 1968년 2월 12일 베트남의 한적한 농촌마을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복원해 최근 책(<1968년 2월 12일>)으로 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기사는 한국 사회에 공명과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베트남전 사죄운동과 평화박물관건립 추진의 계기가 되었다. 반작용도 컸다. 보도에 격분한 고엽제 피해자 단체 회원들은 <한겨레> 사옥에 난입했다. 최근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이해 피해자들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지만, 참전 단체 회원들의 항의시위로, 1968년 2월 12일 그날처럼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왜 평행선일까?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다. 그날의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우연히 학살장면을 목격한 제3자(미군 병사)가 카메라에 담은 '현장감식' 사진, 그리고 주월 미군사령부와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오간 공식서한 등은 하나같이 한국군의 '피 묻은 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베트남전 참전 단체와 군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간인 학살 문제 제기 이후 나온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민사심리전을 다룬 논문에서도 양민 학살 사건은 '미제'로 남겨져 있다.
"한국군의 경우에도 미군 등 다른 연합국 군대에 비해 효율적인 대민작전을 전개했다고 하나, 일부 부대의 무리한 무력 위주 작전으로 일부 지역에서 대민 피해를 유발하게 됨으로써, 국지적인 부작용을 낳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양민학살'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최용호,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작전 및 민사심리전 수행방법과 결과>, 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