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조리원보다 편한 반지하 '엄마의 방'

[부모님의 뒷모습 ⑤] 엄마와 함께한 신혼 위기 극복기

등록 2015.05.31 18:52수정 2015.05.3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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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갔다. 대문 왼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문이 붙어있다. 지하 방엔 아가씨들이 산다. 나도 저 방에 산 적이 있다. 내가 결혼하기 두세 달 전에 부모님과 난 지하 방으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지인에게 잘 못 서 준 보증 때문에 부모님은 천만 원을 대신 갚아야 했다. 목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부모님은 살고 있던 1층을 전세로 내놓고 지하로 이사 갔다. 들어온 전세금 차액으로 빚을 갚았다.

다시 1층으로 올라오는데 삼사 년이 걸렸다. 그동안 엄마는 건물 청소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엄마가 청소 일을 할 때 전과 좀 다른 면이 있었다. 엄마의 다른 모습은 내 상견례에서도 나타났다.

"예단과 폐백은 안 했으면 합니다."

엄마가 돌직구를 날렸다. 저런 말을 하리라 예상을 못 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시부모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시부모님들 얼떨떨해하는 표정이다. 상황 판단을 한 시아버님이 답을 하셨다.

"아, 그럼요. 편하실 대로 하세요."


엄마의 돌발 발언, 쾌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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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손 나를 키워낸 엄마의 손이다 ⓒ 강정민


신랑과 난 평등한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여성 주례와 남녀 동시 입장에 예단과 폐백도 없는 결혼식을 원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결혼식을 하려고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을 생각을 했다. 사실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양가 모두 그럴 형편은 아니었다. 나름 우리가 생각한 대로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상견례가 변수였다. 여기서 혹시 부모님들이 체면을 차리려고 예단과 폐백을 하겠다고 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상견례 자리에 앉고 보니 우리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우리는 입도 뻥긋 못하고 귀만 쫑긋 세우고 있었다. 한두 시간 동안 많은 말이 오갔다. 솔직히 모두 쓸데없는 말들이었다. 양가 부모님은 사돈 될 사람들에게 흠을 잡히지 않으려고 과하게 깍듯했다.

아버님들은 한때 잘나갔던 때 이야기를 살짝살짝 꺼내며 집안 자랑을 했다. 상견례 자리에 앉은 우리는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낯설게 보였다. 이렇게 가식적인 대화가 점점 길어지다가 남 눈만 의식하는 결혼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점점 불안으로 치달을 때 엄마가 딱 한마디 말을 내질렀다.

"예단과 폐백은 안 했으면 합니다."

엄마의 그 말 한마디가 상견례 자리의 결론이었고, 이후 결혼식의 방향을 정했다. 나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둔 엄마의 한 수에 난 속으로 환호를 했다. 엄마는 남의 빚까지 대신 갚은 처지에 그런 허례허식에 돈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중에 듣고 보니 시댁 식구 중에 예단 없는 결혼에 대해 불만을 나타낸 분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예단까지 안 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우리도 뭐 해줄 형편이 아닌데 뭘 그래. 안 주고 안 받는 거지."

예단 없는 결혼식에 대한 불만은 다른 시댁 식구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결국, 엄마의 도움으로 우리가 원했던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씩씩하고 솔직했던 엄마가 없었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년 뒤 첫 아이를 낳았다. 몸조리를 해야 하는데 산후 조리원 가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돈이 없었다. 우리는 경기도 외곽의 신혼집에서 서울로 이사하느라 추가 대출을 받아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내 형편을 뻔히 아는 친정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겠다고 불렀다. 청소일 하러 다니는 엄마에게 내 산후조리까지 시키는 것이 죄송스러웠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버지는 마침 오랫동안 했던 일을 접고 새로운 일을 찾으려고 집에 쉬고 계셨다. 아버지 나이가 예순 일곱이라 일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친정에 몸조리하던 어느 날이었다.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했던 엄마가 오후 네 시에 퇴근하셨다. 지친 엄마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내게 미역국 상을 차려주셨다. 미역국을 먹은 뒤, 엄마와 나는 아기 목욕을 시켜줘야 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엄마는 밖에 널린 빨래를 걷어서 들어오셨다. 빨래를 개던 엄마가 엉망인 집안 꼴을 보고 아버지에게 화를 내셨다.

'엄마의 방'에서 산후 조리... 마지막 비빌 언덕

"아니, 집에서 이 정도 일은 해 줘야 내가 살지. 일하고 온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해?"

나는 문 밖의 부모님 말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한탄이 이내 내 남편에게 넘어갔다. 아내랑 자식만 맡겨두고 장인, 장모만 고생시키는 사위에 대한 불만을 아버지가 터트렸다.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신랑이 그렇게 잘못을 하고 있는 건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랑이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무심하게 행동하진 않은 거 같았다. 아버지가 터트린 불만의 원인은 신랑보다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듯 싶었다. 두 분의 힘겨운 여건과 더 어렵게 만든 나의 산후조리.

아버지가 신랑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그냥 막 섭섭했다. 산후 조리하러 온 딸을 이렇게밖에 못 품어주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또 엄마가 얼마나 힘이 들까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 짧은 순간 마음속에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으로 쏟아져 나왔다.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산후조리원 들어갈 돈도 없었고 사람을 쓸 형편도 아니었다. 죽으나 사나 친정에서 몸이 좋아질 때까지 내가 혼자 아기를 볼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했다. 사실 남일이었다면 부모님의 반응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건물 청소 일에 집안 일까지 하는 엄마가 사는 지하 방에 새끼 낳고 산간해달라고 기어들어 온 내가 문제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서러웠다. 나는 미역국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돈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아무리 비싼 돈을 내더라도 엄마의 방보다 내 마음이 편할 곳은 세상 천지에 없다. 나와 아기가 마음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여기 엄마의 방뿐이다. 그래도 다행히 엄마는 사위에 대한 불만을 내보이진 않으셨다. 난 엄마의 방에서 산간을 마칠 수 있었다.

반지하 방에 살던 엄마는 힘겨웠지만, 용감했고 씩씩했다. 덕분에 나는 어려웠던 신혼 시기를 잘 살아서 넘겼지 싶다. 그때 태어난 아기는 지금 멋진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아무리 가난한 지하 방이라도 엄마의 방은 내가 비빌 수 있는 마지막 언덕이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부모님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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