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도 못 읽는 사람을 쓰면 어떡해"... 엄마가 들은 막말

[부모님의 뒷모습③] 뭉툭하고 거친 엄마의 손

등록 2015.04.29 14:27수정 2015.05.0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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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손 나를 키워낸 엄마의 손이다 ⓒ 강정민


"어머님 손을 보니까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알겠어요. 고생을 많이 하신 손이네요."


의사가 엄마의 뭉툭한 손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엄마는 부끄러운 듯 살포시 웃는다.

"그 시절엔 다 그렇게 살았지. 나만 고생하고 살았나."

그런데 내 얼굴이 뜨거워진다. 일하는 손 우리 엄마 손이 자랑스럽다고 쓴 글도 있다는데 나는 왜 이럴까? 그렇다고 엄마의 손이 부끄러운 건 아니다. 난 내가 부끄럽다. 엄마의 손을 거칠게 만든 노동으로 자란 내 삶이 부끄러워 그 순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엄마의 뭉툭하고 거친 손. 그에 반해 내 손은 곱다. 의사는 나를 어찌 생각할까? 병원 의사와 나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여태 지각있는 척 폼 잡고 살았는데 의사한테 내 속을 다 들킨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거의 돈벌이를 했다


몇 년 전, 엄마가 손과 머리를 많이 떨었다. 실을 바늘에 꿸 때도 손을 떨었다. 글을 쓰려 하면 볼펜이 떨렸다.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는 머리를 흔들었다. 엄마를 모시고 동네병원을 찾았다.

"엄마가 손과 머리를 많이 떠셔서 혹시 파킨슨병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

의사는 엄마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다. 검지만 편 채로 두 검지가 직선이 되게 천천히 만나게 하라고 했다. 검지는 심하게 흔들렸다. 의사는 엄마의 손을 자신의 손에 올려놓고 손등과 손바닥을 찬찬히 살폈다. 손길이 더없이 따뜻했다. 의사는 "고생을 많이 하신 손이네요" 하며 엄마의 삶을 위로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에 울컥했다.

나는 엄마 나이 마흔에 태어난 막내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거의 돈벌이를 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가 공사장 잡부로 일했던 거다. 모래와 벽돌을 날랐다. 엄마와 아줌마들은 도시락을 먹고 남는 시간에 낮잠을 잤다. 잠들기 전에 엄마는 나에게 "반장 아저씨가 종을 치면 엄마 꼭 깨워" 하며 당부를 했다. 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엄마 옆에서 놀았다.

그리고 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해방촌으로 이사했다. 이사한 집은 1층에 문방구가 있고 2층엔 살림집이 있었다. 2층은 세를 주고 우리 여섯 식구는 1층 문방구 옆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부엌도 없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찬장을 놓고 살림을 했다. 인수하고 보니 1층 방에 만화책이 많았다. 문방구에 만화방까지 겸업했던 거다. 밤에 여섯 식구가 복닥거리고 살던 방이 낮에는 만화방이 되었다. 문방구 운영은 엄마가 맡아야 했다. 처음에 엄마는 물건 이름도 가격도 몰랐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무서워서 숨었다.

학기 초가 되면 물건을 사러 다녀야 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남대문 시장으로 갔다. 물건을 가득 담은 가방을 양손에 든 엄마는 계단을 오르내릴 땐 몇 번이고 쉬었다. 손을 보면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엄마는 그 뭉툭하고 굵은 손으로 공책이며 도화지를 사다 팔았다. 택시를 탈 엄두도 못 냈다. 하루는 엄마에게 왜 우리는 배달을 안 시키냐고 물은 적도 있다.

"배달 시키려면 물건을 많이 주문해야 하고 안 좋은 재고품이 와."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문방구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자연히 문방구를 접게 된다.

도시락 두 개 싸서, 새벽 첫 차 타고 출근한 엄마

내가 대입시험을 볼 때쯤 엄마는 다시 일을 구한다. 나이 든 여자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청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는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새벽 첫 차를 타고 출근을 해야 했다. 엄마가 일했던 곳 중 특허청도 있었다. 특허청에는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특허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집에서 새벽같이 떠나 서울에 온 사람들. 하지만 특허를 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분풀이를 화장실에서 했다.

"화장실에 가면 사람들이 아무 데나 가래를 탁탁 뱉어 놔. 그 사람들도 오죽하면 그러겠냐? 더럽고 아니꼬우니까 그러겠지."
"남자직원 책상엔 가족사진이 있어. 화나는 일 있어도 가족 생각해서 참으려고 사진을 두었나봐."

청소하는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멸시가 있었겠지만, 엄마는 별스럽지 않게 넘기는 것 같았다. 되레 일터에서 만난 사람을 자식처럼 안쓰럽게 바라보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엄마가 견출지와 사인펜을 들고 와서는 나에게 말했다.

"정민아, 여기에 큼지막하게 글씨를 써 줘."

엄마는 열쇠에 새로 붙일 '회의실, 탕비실...' 이름을 써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회의실 문이 잠겨서 직원들이 엄마에게 문을 따달라고 했단다. 노안인 엄마는 열쇠에 볼펜으로 써진 글씨가 잘 안 보여 열쇠를 금방 찾지 못했다. 엄마는 열쇠꾸러미에서 이 열쇠, 저 열쇠 계속 넣으며 열쇠를 찾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 직원은 화가 잔뜩 났는지 청소 반장에게 한마디를 했다.

"아니, 글도 못 읽는 사람을 쓰면 어떡해요? 아무리 청소일이라도 그렇죠."

졸지에 엄마는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한글을 진짜로 몰랐다면 그 직원의 말이 더 서러웠을 것이다. 그 말을 전하며 엄마가 울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당장 그 직원을 찾아가 "당신은 부모도 없어!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해!" 하고 따지고 싶었다.

엄마는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을 했다. 엄마는 그 손으로 변기에 붙은 가래를 닦아내며 나를 대학까지 보냈다.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노년을 보내기 위해 엄마는 예순여섯까지 일을 했다.

오늘도 엄마의 손은 쉬지 못한다

그리고 십 년쯤 지난 뒤 엄마는 손과 머리를 떠는 증상으로 병원에 가게 되었다. 의사는 다행히 "어머니가 지금 떠시는 거는 파킨슨병이 의심되기보다는 노화로 생긴 현상 같아요,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나이 팔순이 된 엄마는 아직도 쉬지 못한다. 비가 오면 세입자들 사는 곳 바깥 수채에서 머리카락을 건져 내고 재활용 쓰레기를 치워준다. 절약이 몸에 밴 엄마는 세탁기 헹굼 물을 그냥 버리지 않고 대야에 모아둔다. 잘 걷지도 못하는 엄마가 꼬부라진 허리로 대야의 물을 변기에 퍼붓는 모습을 보면 내 속이 터진다.

"엄마! 이런 것은 젊었을 때나 하는 짓이야. 이제는 제발 그만해!"
"내 양심이 걸려서 그래! 더 힘들면 그만둘 거야!"

얼마나 더 아파야 얼마나 더 늙어야 세탁기 헹굼 물을 그냥 버릴 수 있을까? 오늘도 엄마의 손은 쉬지 못한다. 아이 셋을 키우는 나, 아직도 내 손은 곱다. 엄마 손에 비해 내 손은 한없이 부끄럽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부모님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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