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 스머프가 손을 흔들며 나올 것 같은 동굴집들.
한성은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경이로움이 솟아났다. 여행을 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지금까지 여행 많이 다녀 본 사람이 잘난 척하려고 쓰는 문장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뭐' 하며 지냈는데, 그 말이 맞았다. 경이로운 자연을 마주하면 사고가 전 지구적인 스케일이 된다. 내가 사는 곳이 한국, 부산, 해운대가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분명히 그 언덕에서 끝없이 펼쳐진 카파도키아를 조망하며 나는 분명하게 인지했다. 나는 지구인이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인식이 급격하게 확장되는 경험은 굉장히 압도적인 충격이다. 빅뱅 이후 우주가 급팽창하던 순간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스탄불에서의 경험도 있고, 우리나라를 떠올려도 그렇고 관광지 식당과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은 늘 실망스럽다. 길가에 늘어선 식당들 말고 마을 뒷골목 어딘가에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현지인들이 찾는 식당이 진짜 맛집이고, 진짜 싼 집이다. 부산에 살다 보면 외지에서 놀러 오는 손님들이 가자고 하는 소위 '맛집'이란 곳은 대부분 현지에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곳일 때가 많다. 여행자들끼리 모여서 부산 최고의 맛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아 우스울 때가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현지인 식당을 찾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물론 이것도 내가 그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워낙 조그만 동네라서 안 가본 골목길이 없을 정도다. 길가에 늘어선 식당들은 나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차마 들어가지를 못했다. 좁은 동네이면서 관광객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보니 한국 여행객들이 써 놓은 식당 후기 몇 개만 보면 이 동네의 모든 식당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점점 배가 고파온다. 서러움도 밀려온다. 왜 이리 궁상맞게 다닐까. 한국에서라면 잔뜩 주문해놓고 반쯤은 쿨하게 남기고 배부르다며 2차를 갔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가게 주인들과 택시 기사 아저씨와 공원 벤치의 한량들까지 어찌나 나를 불러대는지 웃으면서 '노 땡큐' 하는 것도 배가 고파서 못 할 지경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파마를 하고 와서 머리가 뽀글뽀글한데 머리를 풀고 길을 걸으면 '니하오!'라고 하도 외쳐대서, 머리를 상투처럼 묶고 나름대로 강한 인상을 팍팍 풍기며 다녔더니 이번에는 '곤니찌와~~~~~~!'라며 꼬맹이들이 따라다닌다. 태극기 티셔츠를 가져올 걸 그랬나 보다. 그랬다면 여행 내내 "안녕하세요오오오!"를 듣고 다녔겠지.
여행하면서 익힌 한 가지 팁이 있는데, 속칭 삐끼들이 와서 동아시아 3개 국어를 모두 퍼부으며 어디서 왔냐고 계속 귀찮게 굴면 "카자흐스탄"이라고 하면 된다. 이 아이들도 낯선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어버버버' 하다가 그냥 간다. 그렇게 몇 명 보냈는데 효과가 좋다.
한참을 걷다가 그냥 포기하고 숙소에서 밥이나 안쳐서 먹어야겠다고 돌아가는 데, 숙소 바로 앞에 빵 가게가 있었다. 화려한 베이커리가 아니라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던 딱 그런 빵 가게였다. 터키인들은 주식이 빵이다. 식당에서도 요리를 주문하면 에크멕(Ekmek)이라고 부르는 빵은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동네 식당에서는 그냥 식탁 위에 쌓여 있다. 호텔 사장님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빵집은 있나 보다 싶었다.
그동안 식당에서 나오는 빵만 먹어봤지 빵 가게에서 빵을 사 먹어 보지는 않았다. 빵 가게 안에는 화덕이 있었고, 연신 따뜻한 빵이 구워져 나오고 있었다. 기다란 에크멕 하나 가격은 무려 0.7리라였다. 우리 돈 300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스콘 같이 생긴 빵도 골랐더니 아저씨가 이건 비싼 거라고 다른 걸 권해줬다. 정말 맛있었던 그 스콘은 1.5리라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몰골을 알 수 있었다. 1.5리라짜리 몰골인가보다.
'나 돈 있어요'라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떠오르는 대사를 내뱉고 빵을 사 왔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날 샀던 빵은 계속 가지고 다니며 3일을 먹었다. 그런데 빵이 하도 안 줄어들어서 나중에는 조금 슬펐다. 이렇게 아껴서 아파트라도 한 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