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커피 한 잔과 자두 몇 알은 네로 황제의 식탁과도 바꿀 수 없는 성찬이었다.
한성은
외투를 벗어서 말리고, 전기 난로 앞에서 언 손을 녹이고 있는데, 메틴 아저씨가 따뜻한 커피를 타 오셨다. 그리고 자두 몇 알을 내어 주셨다. 사실 추위 때문에 허기를 못 느꼈을 뿐이지 종일 굶은 탓에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아저씨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어 주고, 난로를 켜 주고, 커피를 타 주고, 자두를 나눠 주셨다. 게눈 감추듯 다 먹고 나니 웃으면서 더 많이 가지고 오셨다. 차를 마시고, 자두 몇 알을 집어 먹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든다.
뭐라고 뭐라고 하시는 데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다.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한 순간은 물건 값을 깎을 때도 아니고, 예쁜 아가씨를 만났을 때도 아니었다. 이렇게 고마운 분들을 만났는데, 몇 마디 대화도 나눌 수가 없어서 정말 속이 상할 만큼 답답했다. 그제야 스마트폰이 떠올랐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웬만한 단어 정도는 번역이 가능했다. 그때부터 아저씨들과 암호 해석과 같은 필담이 시작되었다. 터키어 문장을 써주면 단어 하나 하나 찾아가면서 해석하고, 다시 영어로 답을 써서 터키어로 번역하여 메모지에 적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거나, 이상 기후에 대한 과학적 고찰을 한 것은 아니다. 어디서 왔냐, 나이가 몇이냐, 직업이 뭐냐, 어디 가는 길이냐, 이 과일이 한국에도 있느냐 정도였다. 하지만 한참을 답답해 하다가 겨우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정말로 설레고 신났다. 소개팅에서 만난 이성이 나와 같은 인디 밴드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보다 행복했다. 터키어를 배우고 싶었다. 단어 하나 하나가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언어 교육이라는 것이 이렇게 이루어져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배운다는 것은 어느 것이나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마치 모국어처럼 또는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익힌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배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다.
학교에서 문학 수업 시간에 시조를 가르치며 "이 작품 진짜 멋지지 않아요?"라고 했다가 아이들의 초점 잃은 눈빛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렇게 멋진 시조를 좋아하지 않다니!' 일단은 나의 수업이 형편 없기 때문이겠다. 그리고 그전에 그런 문장을 내 입으로 뱉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나는 심지어 문학을 가르치고, 얼마나 잘하는지 감히 평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부여했던 사람이다. 즐거움을 제거해 버린 배움은 노동과 다름 없다. 내가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지금도 감동을 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시험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수 좋은 날>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읽고 또 읽어도 지겹지 않다.
학교 교육 제도에서 평가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담을 주고 받던 그 순간만큼 강렬하게 '외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교육 과정과 교수법이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돌려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터키어를 배우고, 메틴 아저씨와 사디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다면 참 즐거울 것 같다.
낮에 만난 초등학생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사실 다음 달에는 그리스를 지나 몰타에서 어학연수를 계획하고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정에 넣었다. 아직 배우지도 않았는데 배움에 대한 기대로 설렌다.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