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리 잠 못자는 아이, 덕분에 책 읽은 엄마

[엄마의 밑줄]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등록 2017.12.25 18:12수정 2018.06.2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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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사는 시간을 버티게 해준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 '엄마의 밑줄'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자는 게 유난히 힘든 아이였다. 잠드는 게 쉽지 않은 건 물론이요, 잠이 들었다가도 30분이 지나면 깼다. 심할 때는 하루 3시간 낮잠을 5,6번 나눠서 잤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등센서 최강자'답게 등이 바닥에 닿으면 무조건 깼다. 온갖 방법을 다 써 보다가 다시 재우는 게 오히려 더 스트레스라는 결론을 내리고 생후 9개월까지는 아예 내내 품에 안고 재웠다.

소파에 기대고 앉아, 잠든 아이를 안고 있으면 아이라는 감옥에 갇힌 것 같았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그랬다. 화장실도 갈 수 없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잠이 부족한 신생아 시절에는 아이를 안고 같이 잠들거나 그나마 자유로운 손으로 스마트폰을 했다.


스마트폰은 세상과 나를 이어 주는 유일한 창구였다. 하지만 점점 그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휘발돼 버리는 가십성 정보들, 카톡으로 잠깐 이어졌다 이내 끊기는 관계들. 공허했다. 외로웠다.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라서 행복했고 엄마라서 불행했다

 아이는 자는 게 유난히 힘든 아이였다(자료 사진).
아이는 자는 게 유난히 힘든 아이였다(자료 사진). pixabay

내 해방구는 책이었다. 소파 옆에 책을 갖다놓고 아이가 잠이 들면 곧바로 책을 펼쳤다. 단편소설은 완벽한 친구였다. 몸은 아이에게 매여 있지만 소설 한 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만 같았다.

호흡이 긴 책을 읽을 때면 아이의 다음 낮잠 시간이 기다려졌다. 한 손으로는 책을 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 엉덩이를 토닥이며. 행여 아이가 깰까 조심조심,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 시간만큼은 엄마라는 이름이 아닌 온전한 나로 사는 시간이었다.

예민한 아이는 밤잠도 자주 깼다.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볼 방법은 없을까. 친구의 추천으로 전자책을 구입했다. 스마트폰에 비해 빛이 밝지 않아서 어두운 곳에서 보기 편하다. 책만 읽을 수 있으니 다른 곳으로 샐 일도 없다.


아이를 재울 때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틀어놓기도 했다. 눈으로 책을 읽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오히려 낭독으로 듣는 것이 글 한자 한자에 더 집중하게 했다. 까만 어둠 속에 낭독자의 목소리와 아이의 숨소리만 떠다니는 시간.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는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몰입해서 읽은 에세이다. 시를 읽는 듯 담백하고 리듬감이 느껴지는 문장. 인장이 명확하게 새겨진 오직 자신만의 문체. 글의 형식보다 나를 끌어당긴 건 삶에 대한 고민과 통찰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은유의 사고들이었다.


여성으로, 엄마로, 직업인으로. 학벌과 돈을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울컥한 것들 투성이다. 작가는 그 울컥을 그냥 삼키지 않고 글을 통해 치열하게 싸운다. 싸움에는 처절한 자기반성도 포함된다. 이 책은 그 싸움의 기록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중략...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 주었다."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p.7

내게는 은유 작가의 이 분홍책이 그런 책이었다. 내 고통스러운 감정을 대신 언어로 표현해주는 책. '아, 내가 이래서 힘들구나. 내 감정이 이렇구나.' 내가 왜 이렇게 아픈 건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특히 엄마로서의 고민이 그랬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단조롭고 반복적인 엄마 생활은 끝나지 않았으니 난 종종 외로웠다. 양육의 기쁨과 양육의 고통은 희비의 쌍곡선처럼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엄마라서 행복하고 엄마라서 불행했다. 불행에 삶의 자리를 내어주면 큰일 나는 줄 알았기에 나의 불행과 나의 행복은 자주 다퉜다." p.6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태아가 물컹한 분비물과 함께 나오는 출산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위안으로 삼기엔 그것과 맞바꿀 대가가 너무 크고 길다. 그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모른다." p.31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엄마 역할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 같지 않다." p.52  

아이가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행복을 느끼면서도, 때로는 '제발 눈을 감았다 뜨면 이 곳이 아니었으면' 간절히 바랄 정도로 불행했다. 아이는 너무 예뻤지만 육아는 너무 힘들었다. 예쁨과 힘듦은 결코 상쇄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말했다. 니가 유난스러워서 그런 거라고. 니가 이기적이라서 그런 거라고. 어떻게 엄마가 돼도 그 모양이냐고. 육아만으로도 심신이 지치고 힘든데 '나는 왜 이럴까', '엄마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하지만 육아로 느끼는 '희비의 쌍곡선'은 결코 유난스러운 감정이 아니라고, 엄마라는 경험이 늘 아름답지만은 않은 거라고 은유 작가는 말해주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와 비슷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이들도 있구나. 밑줄을 긋고 책의 귀퉁이를 접으면서 나는 꺽꺽 눈물을 삼켰다.

"그러니 안쓰러운 어린 것에게 잘 해주어야 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자주 힘에 부친다. 내심 잔인해진다. 이 분열적 자아를 바라보아야 하기에 엄마로 사는 일은 쓸쓸하고 서러웁다." p.55

고통이 고통을 알아볼 때

책장을 덮고 나는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책을 읽으며 내내 얼굴이 떠오른 회사 선배 워킹맘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또 한 가지는 지역 맘카페에 '아이와 함께 독서모임' 모집 글을 올렸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아이를 데리고 독서모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생후 8개월이었으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한시도 가만 있지 않으시는 지금은 꿈도 못 꿀 일.

'사교성 제로'로 조리원 친구 하나 못 만든 주제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이라니. 그만큼 나는 절박했던 것 같다. 집 밖으로 나가 사람 아니 말이 통하는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은유 작가는 말한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라고.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틜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든 독서모임 멤버가 이 책을 알려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을 때, 엄마들의 연대란 대단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한 지금. 가끔씩 소파에 앉아 아이를 안고 책을 읽던 그 시간이 그립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참, 아이는 이제 누워서도 잘 잔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서해문집, 2016


#주간애미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엄마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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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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