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 영웅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고 낙담할 즈음에 론다 로우지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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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 로우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나는 이른바 '세기의 대결'이라 불리는 경기를 지켜봤지만 도저히 이입하고 응원할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경기장의 여성들은 모두 들러리에 불과했다. 싸움의 전리품이라도 되는 듯 몸을 전시하는 라운드걸과 차려입은 채로 남자친구와 나란히 앉아 있는 셀럽을 보면서 알 수 없는 굴욕을 느꼈다. '격투기 영웅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고 낙담할 즈음에 론다 로우지가 등장했다.
나에게 론다 로우지는 '처음의 다관왕'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우선 그는 여성 UFC의 포문을 연 장본인이자 케이지를 지배하는 주인공이었다. UFC에서 여성부 경기를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딱 잘랐던 UFC 대표 데이나 화이트는 오로지 론다 로우지의 스타성을 믿고 여성부를 창설했다.
로우지는 수많은 팬을 끌어모으며 여성 UFC의 상징이 됐고 그를 필두로 여성 선수들의 기량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이러한 공로는 여성 선수에게도 남성 선수와 동일한 상금을 달라고 투쟁하며 성 대결까지 불사했던 테니스 천재 빌리 진 킹의 그것과 견줄 만하다.
이런 뒷배경을 모르더라도 론다 로우지의 격투 스타일은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다. 한마디로 그렇게 싸우는 여성은 처음이었다. 특히 그가 힘을 내세우는 선수라는 점, 육중한 근육질 체형을 갖춘 점이 좋았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오리에게 각인된 어미의 모습처럼 이 타고난 싸움꾼의 강렬한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론다 로우지처럼 분노하는 여성은 처음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분노는 남성의 전유물이다. 남성이 감정을 드러내도 좋을 때는 오직 분노했을 때 뿐이다. 반대로 여성이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가부장제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감정이 바로 분노다.
물론 여성들도 분노하긴 한다. 하지만 뒤에서 저주를 내리거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등, 굴절된 방식으로 표출되기 쉽다. 억압으로 인해서 있는 그대로의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할로윈데이에 론다 로우지 분장을 했던 미국의 소녀들이 선망한 것은 '분노할 줄 아는 여성의 아이콘'일 것이다.
그런데 론다 로우지로 인해서 시작된 이 낯선 변화가 남성들에게는 거의 반사적인 거부반응을 일으켰나 보다. 로우지는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지만 특히 남성들에게 미움받았다. 실제로 남성들이 있는 자리에서 론다 로우지를 화제로 삼으면 다양한 유형의 맨스플레인을 접할 수 있다. 개중에서 로우지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의견이 가장 지배적이다.
내가 다니던 체육관의 남자 고등학생 하나는 복싱을 취미로 잠깐 해본 게 고작이면서도 자신이 론다 로우지를 이길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나마 이 정도가 가장 우호적인 맨스플레인에 속하며 나머지는 처참한 수준이다.
실력은 부풀려졌고 인성은 형편없다는 평가와 함께 여성이라는 이유로 외모 비하도 빠지지 않는다. 계속 승승장구할 것 같던 로우지가 부진에 빠지고 연거푸 재기에 실패하면서 그를 향한 조롱과 야유가 더욱 거세졌다. 홀리 홈과 아만다 누네스에게 두들겨 맞던 게 너무 고소했다는 소감을 거듭 강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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