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희의 <앵커브리핑>아내가 눈물 흘렸던 앵커브리핑
JTBC
그러나 더 큰 난제는 아내였다. 아내는 이윤택에 대한 미투 운동이 있었던 날부터 설날 내내 소위 '멘붕'이었다. 처음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연극계는 깨끗한 것 같다는 동료 미술작가에게 '우리는 터지면 다 죽어'라며 시니컬한 웃음을 날리던 아내였건만, 그와 같은 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내는 자기가 20대 초반에 몸담았던 극단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물론 그와 같은 사실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연극계 선후배 페이스북을 전전했다.
급기야 아내는 19일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손석희 앵커는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원작 각본이 다름 아닌 이윤택이었다며 그의 모순된 행태를 비판했는데, 아내는 그제야 그 사실이 기억났다며 TV 앞에서 넋을 잃었다. 비록 극단에 오래 있진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 역시 그런 동료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 때문인 듯했다.
엄마가 이렇게 괴로워하니 아이들도 어찌 집안 분위기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까꿍이는 회사에 있는 내게 '엄마는 계속 화가 나있어 ㅜㅜ' 라며 메시지를 보냈고, 산들이와 복댕이는 잘 놀다가도 뉴스에 연극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 눈치를 보는 듯했다. 확산되고 있는 미투 운동이 우리 집에도 분명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계속되는 미투 운동과 영문도 모르게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아이들. 그런 녀석들에게 드는 감정은 부끄러움과 미안함이었다.
사실 미투 운동을 통해 끝도 없이 터져 나오는 고백들이 충격적이긴 하나 마냥 새로운 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들을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이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예술작품이 어디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사회가 그만큼 썩었다는 것을 이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예컨대 증권가 등에서 도는 소위 '찌라시'의 소문은 많은 이들이 접하는 뉴스다. 또한 최근에 이어지고 있는 성추행 의혹 중 하나는 이미 내가 작년 연말에 친구들 모임에서 들어본 적 있다. 고은, 이윤택 등에 대한 소문은 소위 그 바닥에 조금이라도 몸담고 있는 사람들과 술 한잔 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장자연 사건'은 또 어떤가. 배우 한 명이 목숨을 끊어가며 알리고자 했던 그 엄청난 증언을 우리 사회는 공공연히 덮고 있다. 거기에 관련된 언론사며 피디, 기자 등은 이미 SNS를 통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못 본 척 해왔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 특히 나와 같은 기성세대는 모두 공범이다. 위와 같은 사건들을 정확하게는 몰랐어도, 정황상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짐작했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계 때문에, 혹은 미약한 힘 때문에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 그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이유이다.
'NO'를 말할 수 있는 용기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지금처럼 미투 운동이 계속되면 세상이 바뀔까?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현재 미투 운동의 대상으로 거론되었던 이들의 면면을 보자. 안태근, 고은, 이윤택, 조민기 등등 모두가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히 법을 내세워 타인을 판단했고 자유와 정의를 거들먹거렸으며, 예술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관심을 쏟지 않으면 다시 그들의 왕국으로 돌아가 언제든지 왕이 될 수 있는 괴물들이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 우리는 그 괴물들을 단죄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사회를 만들었다. 그들의 권위 앞에 쉽게 무릎을 꿇었고, 그런 현실과 타협했으며, 세상은 그런 거라며 자위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바로 그런 현실 속에서 처참하게 당했던 피해자들이 자신을 희생해가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공론화시키는 과정일 뿐, 단죄의 과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