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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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꿈이 되는 딸이라니 마하비르가 처음부터 딸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가 세운 계획은 아들을 통해서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과 다르게 딸 넷을 낳으면서, 그는 오랜 꿈을 단념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우연히 딸들의 재능을 발견하고는 '남자가 따든 여자가 따든 똑같은 금메달'이라는,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과 같은 실용주의에 따라 두 딸을 후계자로 삼는다.
그런데 딸이 태어날 때마다 낙담하는 마하비르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의 아버지는 운동 선수가 아니지만, 내가 엄마의 배 속에서 자라는 내내 아들이기를 기대했다. 나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아들이 이미 있었으니, 더 많은 아들을 원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나쁜 아버지였냐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하바르가 아내에게 "기타와 바비타가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야. 다만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들뿐이라는 거지"라고 말했듯, 아버지에게 나는 단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었다.
당시엔 '딸바보'라는 말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불려도 무방할 만큼 애정이 넘쳤다. 그런데 그 애정은 어림과 연약함, 무지와 애교로 점철된, 유아 시절로 한정된 것이었다. 나에게 세계라는 것이 어렴풋하게 생성될 무렵부터 나와 아버지는 서로에게 급격히 무관심해졌다. 나는 아버지의 좌절된 꿈이 무엇인지, 오빠를 통해서나 겨우 짐작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내 세계와 잠재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안 사실은 아버지는 나에게, 허탈할 정도로 기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 뼈아픈 진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든 그렇지 못하든, 절대로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가부장인 아버지가 원하는 나의 삶이란, 또 하나의 가정에 편입된 또 한 명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해내봤자 당연한 귀결이고 못 해내면 자격 미달인, 그 자체로 하나의 덫인 삶이었다. 사실 남성 중심적인 체제 안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역할 기대란 대부분 이런 양상을 띤다.
그런데 아버지의 꿈이 되는 딸이라니! 주인공이 아버지와 아들이었다면 평범한 스포츠 드라마가 됐을 당갈은 중국과 대만 관객을 상대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여권이 낮은 국가인 인도라는 배경, 코치가 된 아버지, 아마추어에서 진정한 선수가 되어가는 딸이라는 조합 덕분일 것이다.
당갈의 주제는 매우 단순하고 확실하다. 바로, '세상이라는 링에 올라서 싸우라'는 것이다. 이 싸움에 있어서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갈의 세계에서는 갈등과 위기에 맞부닥쳤을 때, 싸워서 이기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러한 신념에 따라서 딸들이 싸우고 이길 수 있게, 싸움의 판을 깔아주고 이기는 법을 알려준다. '최선을 다했다면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달콤한 말에 속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여성이 레슬링을 한다는 데서 기인한 세간의 편견과 맞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