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은 1980년 3월 11일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구형 공판에서 검찰관의 논고가 계속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경청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도 김재규 사진이 언론에 거론된 적이 있다. 6월항쟁 1년 반 뒤에 나온 1988년 12월 3일 치 <동아일보>에 3군단과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동부전선의 3군단사령부 강당 벽에도 역대 군단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및 정승화씨의 사진만은 보이질 않는다."
박정희 살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의 초청을 받아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해 12월 12일 체포됐다(12·12 쿠데타). 김재규 입장에서는, 박정희 살해 뒤에 정권을 잡으려면 참모총장을 자기 옆에 둬야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정승화를 초청해놓고, 현장 근처에서 기다리도록 한 것이다. 정승화에게는 내란방조죄가 적용됐다.
1980년 4월 30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김재규를 '패륜아'로 규정했다. 이날 <경향신문>에 따르면, "일부 항간에서 김재규 구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데"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이렇게 답했다.
"김재규가 한 일이 무엇인가. 아비를 죽인 자식과 다를 바 없는 패륜아이다. (중략) 인륜을 짓밟은 패륜아를 한때의 정치적 계산으로 의사(義士) 운운하며 구명운동을 전개한다면, 이는 극소수 종교인들의 인도주의적 차원보다는 도덕적 퇴폐와 윤리관의 말살을 입증하는 행위라 하겠다."
김재규를 패륜아로 규정한 전두환의 태도가 군 부대에서 김재규를 더욱 더 금기시하도록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전두환이 꼭 그 이유만으로 김재규를 미워한 건 아니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으니, 전두환도 당연히 박정희 피살을 슬퍼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죽자마자 정권 장악에 골몰하고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두환은 다른 사람한테 패륜을 운운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패륜을 운운한 것은 김재규를 응징하는 분위기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도 있었다.
박정희가 전두환을 총애하고 후원한 것은 그가 4년제 정규 육사의 시초인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육사 11기 이하를 지원하고 그들 중 일부를 '하나회'라는 불법 사조직으로 묶었다. 5·16 쿠데타에 동참한 육사 11기 이전, 특히 5기 및 8기 출신들을 견제할 목적에서였다.
이런 구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전두환의 심리 속에는 선배 기수들에 대한 경쟁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측이 육사 2기인 김재규와 육사 5기인 정승화의 사진을 내린 것은 1차적으로는 두 사람이 박정희 피살과 관련됐기 때문이지만, 이들에 대한 전두환의 개인적 경쟁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자신을 중심으로 군대 문화를 재편하고자 했던 전두환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상관 사진을 없앴던 박정희그런데 전두환만 이렇게 한 게 아니다. 그를 양성한 박정희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박정희한테 걸림돌이 되는 인물의 사진도 군부대에서 제거됐다. 위의 <동아일보>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이다.
"육군본부 기밀실 벽에는 창군 이후 지금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차례로 걸려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장도영·김계원·정승화씨 등 3명의 전(前) 육군참모총장 사진만은 보이질 않는다. 장씨의 사진은 5·16 이후에, 김씨는 10·26 이후에, 그리고 정씨의 사진은 12·12 이후 어느 날 갑자기 떼어진 것이다."
박정희 피살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은 화를 면한 뒤에 김재규와 공범으로 엮여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를 받았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그 역시 김재규와 함께 묶는 게 유리했다.
그런데 김계원·정승화 사진을 떼어낸 것은 전두환 측이지만, 장도영 사진을 떼어낸 것은 박정희 측이다. 1960년 5·16 당시 박정희는 상관인 장도영의 암묵적 혹은 소극적 지지 하에 쿠데타를 성공시킨 뒤 장도영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반혁명사건으로 엮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가 형집행면제로 석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