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듀발의 가족16세에 고아원에서 퇴소한 줄리 듀발은 23세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한국에서 '고아'로 살아가며 학대와 차별을 받았던 줄리의 삶은 이 입양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줄리 듀발
정현주
16세에 고아원 퇴소, 성년이 된 뒤 23살에 미국으로 입양. 줄리 듀발(Julie Duvall)의 독특한 이력을 접했을 때, 이제까지의 인터뷰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8월 9일 그로부터 받은 이메일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절절하고 충격적인 고백이 담겨있었다.
"한국에서 고아로 지냈던 저의 어린 시절은 한마디로 '죄수'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저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다시 사회로 방출되었습니다. 고아원에 대한 저의 기억은 아주 나쁜 것들뿐입니다. 보육사들은 냉정했고, 원아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학대와 영양부족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고아원 퇴소 후 계속되는 학대와 빈곤, 절망 속에 찾아간 홀트 복지타운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고아원을 떠났다. 그리고 세 가정을 전전하며 가사도우미로 일했다. 마지막에 들어간 집에서 겨우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매일 그 집 식구들을 위해 가사 일을 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나갔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자신이 묵을 방도 없었고, 임금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 기간 내내 학대로 인한 고통에 시달렸다.
"고등학교 2~3학년 때는 같이 고아원에서 자랐던 몇 명의 여자 아이들을 빼고는 아예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고아라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이 나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때 저는 목소리를 잃은 아이였습니다. 제가 고아라는 것을 들키고 또 학대받을까봐,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죠. 이미 많은 학대를 당해 왔고, 제가 무엇을 하고자 한다는 건, 결국 더 많은 학대와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요. 정말 비참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이 제가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힘이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직업을 찾기 시작했지만, 앞길은 막막했다. 돈도 없고, 살 집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한 칸의 방을 얻고, 한 끼 식사를 구하기 위해 어느 사무용품 판매점에서 일했다. 아주 적은 돈을 받고 하루 10시간씩 납품 업무를 봤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점장은 그에게 성적 학대를 저질렀다. 일을 계속하면서 등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허리에 병을 얻으면서 줄리는 이 곤경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갈 곳도 없는 채로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
빈털터리가 된 줄리는 일산에 있는 홀트복지타운을 찾아갔다. 말리 홀트 여사는 그런 줄리를 자원봉사자 자격으로 그곳에서 지낼 수 있게 받아주었다. 줄리는 홀트에 머무는 동안 한편으로는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돈을 벌어야 했지만,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임금을 받지 않기로 하고 어느 사무실에 나가서 일했다. 사장이 자기 노력을 알아봐 주고 정직원으로 채용해 주리라는 기대 속에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마침내 사무실에 결원이 생겨서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 기회가 왔다. 줄리는 그 일에 자신이 적격이라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그러나 사장은 그가 고아라는 것을 알고, 대놓고 "당신은 고아이기 때문에 일자리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거절의 한 마디는 줄리의 모든 꿈과 희망을 뭉개버렸다. 그때 그는 '한국은 내게 어떤 기회도 성공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한 가족이 되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