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의사 묘역에 있는 백정기 묘소
김종성
백정기 역시 민중에 대한 착취 시스템을 혐오했다. 일본에 대한 증오뿐 아니라 착취 체제에 대한 혐오 때문에도 항일운동에 나섰다는 점은, 그가 독립운동과 함께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을 병행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그의 활동을 이렇게 소개한다. 아래의 '남화'는 남중국이다.
"1925년 상하이에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하이에서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南華)청년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 만의 대(大)노동 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써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 공장의 직공 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난징·상하이 등지의 한·중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푸젠성 췐저우에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을 몰아낸 뒤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백정기는 1932년에는 BTP로 불리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일제에 대한 파괴 공작을 추진했다. 그 이듬해인 1932년, 원심창·이강훈과 함께 벌인 일이 유명한 육삼정 의거다.
백정기와 원심창·이강훈은 1933년 3월 17일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일 양국의 정계·군부 요인들과 함께 상하이의 일본 요정인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벌인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행사장에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이들은 연회장 습격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 뒤 현장에 가서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습격 직전에 역습을 받아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 때문에 백정기는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에 1934년 6월 5일 폐병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육삼정 의거 같은 독립운동은 결과 못지않게 행위 자체가 갖는 의미도 매우 중요하다. 일본인이나 일본 시설에 대한 공격이 미수로 끝날지라도, 그런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과정에서 애초의 목적이 성사되는 경우가 많다.
1932년 이봉창의 히로히토 일왕(천황) 암살도 미수로 그치고 말았지만,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육삼정 의거의 경우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 거점 중 하나인 상하이에서 한국 독립투사들이 대담하게 벌인 의거라는 점에서 국제사회를 긴장시킬 만한 일이었다.
백정기가 한·중·일 삼국을 무대로 일으킨 의거들은 '한민족이 살아 있으며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했다. 1946년에 우리 국민들이 이봉창·윤봉길과 함께 그를 일반 장례식도 아니고 국민장으로 모신 것은 그의 독립투쟁이 갖는 커다란 의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순국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작용한 측면도 있지만, 그의 독립투쟁이 갖는 의의에 대한 전 국민의 공감대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국민장을 통해 민족적 추앙을 받았던 그가 그 후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갔다. 1차적 원인은, 아나키스트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동지들이 해방 뒤에 정치적 기반을 잡지 못한 게 최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주의 계열은 남한에서 기반을 잡고 공산주의 계열은 북한에서 기반을 잡은 데 반해, 아나키스트들은 그 어디서도 기반을 잡지 못했다.
같은 아나키스트인 신채호·이회영 등이 해방 뒤에도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유산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경우에는 역사학이 일천하던 시절에 역사 저술물들을 남겼고, 이회영은 이시영 부통령 등을 비롯한 유력한 혈육들을 남겼다. 그래서 이들은 아나키스트 계열인데도 상당한 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백정기는 자신을 기억해줄 존재들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독립투쟁도 서서히 잊혀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다 그럴 것이다. 박열처럼 뒤늦게나마 영화로라도 재조명되지 않는다면, 남북 어디서도 기반을 잡지 못한 아나키스트들이 제대로 된 조명을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남북에서 각각의 정권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입지가 불리해졌다는 점 외에, 백정기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이승만 때문이다. 삼의사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에 효창운동장이 들어서 있는 사실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의 횡포, 역사에서 잊힌 백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