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7월 18일의 청와대 오찬.
경향신문
사실 박홍의 주장도 전광훈만큼이나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증거가 다 있다'고 했지만 쓸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홍의 주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민주자유당 집권기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엉터리 같은 주장일망정 보수세력이 그의 발언을 중심으로 강한 응집력을 보여줄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이 박홍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것은 그들의 '위기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은 상태였는데도, 그들의 두려움은 상당 수준으로 고조돼 있었다. 그런 정서가 '박홍 현상'을 낳은 핵심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민중항쟁들과 비교할 때 1987년 6월항쟁이 갖는 특징이 있다. 3·1운동, 4월혁명, 5·18 광주항쟁과 달리, 6월항쟁 등은 동서 냉전구도가 급속히 와해되는 탈냉전과 비슷한 시점에 발생했다. 6월항쟁 이후에는 독일 통일(1990)과 소련 붕괴(1991)로 탈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이념대결 구도가 계속 약해졌다.
이로 인해 한국은 안으로는 민주화 확산과 밖으로는 탈냉전 확산이라는 이중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이 때문에 한국은 변화를 강요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민주주의 억압과 반공 논리에 힘입어 이 땅을 지배해온 보수세력을 위협하는 현상이 비슷한 시기에 나라 안팎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보수세력의 눈에는 세상이 말세처럼 보일 만한 일들이었다. 진보세력의 역량 증대로 그들의 권력 상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보수세력이 두려움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세력을 주사파나 친북세력으로 매도하는 목소리가 뜻밖에 종교계에서 튀어나왔다.
'여기도 주사파, 저기도 주사파, 주사파가 판친다'는 신부의 목소리가 청와대 점심 자리에서 갑자기 울려퍼졌다. 정치인이나 학자가 아닌 성직자한테서 나온 소리라 그 반향은 한층 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위기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짜임새 있는 주장보다 감정적이고 허술한 주장에 쉽게 매혹되고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박홍의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진보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보수가 정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수 진영의 위기감이 심했기 때문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논문 <탈냉전 이후 한국적 매카시즘의 탄생>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김일성 조문 문제와 같은 시점에 발생한 박홍 현상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한국에서의 매카시즘은 세계사적으로 탈냉전의 과정이 일어나고 국내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 가서 본격화되었다. 탈냉전과 민주화는 냉전적 보수세력들에게 위기감을 주었고, 이들의 위기감은 보수 언론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조문 사건과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은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다. 두 사건 모두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형법상 문제가 되지 않은 발언에 대해 비판을 한 사건이었고, 한국 사회 내에서 북한을 추종하는 좌파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2014년 발행한 <역사와 현실> 제93호.
박홍은 민주화와 탈냉전으로 보수세력의 위기감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주사파 논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엉터리 같은 주장들이 보수세력의 호응을 받으며 돌풍을 일으키고 한국 사회를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보수세력의 입지가 좁아진 결정적 이유 '촛불혁명'
지금의 전광훈도 비슷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논쟁을 제기했다. 촛불혁명으로 인해 민주화가 다양한 분야로 한층 더 확산될 뿐 아니라,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한반도 탈냉전이 급진전되는 상황에서 '제2의 박홍'이 되어 주사파 세 글자를 입에서 쏟아내고 있다. 보수세력의 이념적 기반이 급격히 흔들리는 상황에서 '박홍 2'가 되어 등장한 것이다.
이는 전광훈이 제기한 논쟁이 그 본인에 의해서건 동조자들에 의해서건 앞으로도 상당 정도 지속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이 그런 논쟁의 확산을 조장하기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박홍과 달리 전광훈과 동조자들 앞에는 불리한 조건이 놓여 있다. 6월항쟁은 보수정권을 무너트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박홍은 보수세력이 여전히 집권하는 유리한 상태에서 주사파 논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촛불혁명은 보수정권을 무너트리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미투운동과 갑질 문제 등에서 알 수 있듯 촛불혁명의 여파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한층 더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사회 각계에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보수세력의 입지가 사회 곳곳에서 좁아지고 있다.
그래서 예전과 같은 보수정권의 출현이 앞으로는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수세력은 존재하겠지만 박근혜 정권 같은 보수정권은 앞으로는 출현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보수가 아닌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옛날 보수'의 가치를 추종하는 전광훈과 동조자들이 박홍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논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집권 세력의 후원을 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을 뜻한다. 청와대에서 점심을 먹으며 주사파 논쟁을 꺼내든 박홍과 달리,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주사파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전광훈의 모습이 '옛날 보수'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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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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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도 '막말 성직자 전광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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