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제단에 무궁화대훈장이 놓여있다.
공동취재사진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0일 별세함에 따라,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1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김연철 통일부장관은 기자들에게 "오늘 오전에 장례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부고를 (북한에) 전달했다"고 말한 뒤, 북한의 조문단 파견을 긍정적으로 기대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아직은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외신에서는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12일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을 통해 "북한이 이희호 여사 조문을 위해 국무위 부위원장급 인사를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발표가 나온 건 없다.
국가 지도자나 유력 인물에 대한 조문 문제는 과거에는 훨씬 더 민감한 사안이었다. 왕실들이 역사를 주도하던 왕조시대에는 특히 더 그랬다. 세계 곳곳을 지배하는 왕실들은 '동업자'인 이웃나라 왕실이 겪는 상사(喪事)에 슬픔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국제적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나 1894년 동학혁명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웃나라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면 주변 왕조들이 가급적 군대를 보내주곤 했던 것은, 평소에 구축한 그 같은 동업자적 유대 관계에 기반한 것이기도 했다.
왕건의 신라 통일에도 '조문 외교'가 있었다
왕조시대 국가들은 황제국 입장인 강대국에 불행이 생길 때는 물론이고, 신하국 입장인 약소국에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도 조문단을 보내거나 조의를 표시했다. 일례로 조선의 경우에는, 황제국인 명나라뿐 아니라 신하국인 대마도나 여진족 부족들로부터 부고를 받을 때도 그렇게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적대 국가에도 조의를 표할 때가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초대 군주인 박혁거세는 적대 관계인 마한왕이 세상을 떠나자 "지금 그의 죽음을 틈타 침공하면, 그 나라가 어렵지 않게 정복될 것입니다"라는 신하의 건의를 물리치고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며 조문단을 마한에 파견했다.
고려 태조 왕건도 조문 외교를 잘 활용했다. 그가 통일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그는 927년 후백제 견훤에 의해 비참하게 죽은 신라 경애왕을 위해 조문단을 파견했다. 그 뒤 후백제의 내정간섭에 시달리던 신라 경순왕을 방문해 위로를 표시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신라본기는 말한다.
신라를 어떻게든 압박하고 제재하려는 견훤과 달리, 신라 왕실의 아픔을 위로하려고 애쓴 왕건의 태도는 신라의 호족(지방 세력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왕건이 신라를 손쉽게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 왕실은 물론이고 지방 호족들로부터도 인심을 샀기 때문이다. 조문 외교가 왕건의 이미지에 긍정적 작용을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조문 외교는 오늘날까지도 국제 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 북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통일 운동을 했거나 북한과 인연이 깊은 남한 인사의 별세에 대해 조의를 표시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남북관계 푸는 특사단 역할까지 한 북한 조문단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전을 보내 슬픔을 표시했다. 이때는 조문단을 파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북한이 내부적으로 핵실험을 준비하던 상태에서 노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했고, 이틀 뒤인 25일 제2차 핵실험이 단행됐기 때문이다.
석 달 뒤의 김대중 대통령 국장 때는 조문단 파견이 수월했다. 북한은 김정일의 조전을 보냄과 별도로, 김기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등이 포함된 조문단을 파견했다. 비서는 노동당 내에서 일종의 국무위원 같은 직책이고, 통일전선부는 노동당 내의 통일부 같은 기관이다.
이때 방문한 북한 조문단은 특사단 역할까지 수행했다. 현인택 통일부장관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도 만나고 돌아갔다. 제2차 핵실험 이후의 긴장된 국면 속에서 조문 외교가 남북관계 개선에 일정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