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주시경은 25살의 청년으로 1900년 새해를 맞았다. 이 연대는 소수의 매국노와 친일파, 기회주의자를 제외하면, 의식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고난과 수모와 시련의 시대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국치가 그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1900년 11월, 일본의 '경인철도 합자회사'가 주도한 경인철도가 개설되고, 1901년 2월 일본의 주도로 신식화폐 조례가 공포되고, 1902년 1월 청국에서 영국의 이익과 한국에서 일본의 이익을 서로 옹호하기로 약조한 영일동맹이 체결되고, 3월 서울 - 인천 간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이를 두고 '한국근대화의 시발'이라 왜곡하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하고자 강화도조약의 체결지에 먼저 철도와 전화를 개설하고, 저들의 경제침탈이 쉽도록 신식화폐를 만들게 하였다.
주시경은 1900년 1월 서울 정동에 소재한 영국인의 한국어 교사로 초빙되어 5년 동안 영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2월부터는 상동 사립학숙에 국어문법과를 개설하여 1년여 동안 학생들에게 우리글의 문법을 교수하였다.
1904년 3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정동 간호원양성학교의 교사 겸 사무원의 직을 맡고, 1905년 2월 상동 사립청년학원 교사로 취임하여 같은 해 9월 이 학원 학감의 책임을 맡았다가 1907년 6월에 사임하였다.
주시경이 여러 기관에서 청년들의 각성과 계몽을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글을 가르치고 있던 시기에 국가의 운명은 날이 갈수록 일제의 수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04년 1월 고종은 러일전쟁의 기미가 보이자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실효성이 없는 제스츄어에 불과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고종의 '국외중립'에는 안중에 없고, 배고픈 늑대가 되어 조선이란 먹잇감을 노렸다.
일본 함대가 1904년 2월 8일 뤼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면서 시작한 러일전쟁은, 그 다음날인 9일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하고,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한데 이어, 4월 3일 서울 용산에 일본군 주차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사실상 점령군 역할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