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7일 서울 충무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1980년 언론사 통폐합 및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 조사결과 발표에서 이명춘 조사3국장(왼쪽)이 언론통폐합 집행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시 <경향신문> 기자 고아무개는 지난 2008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1980년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1980년 5월 17일 밤 자택에서 아무 이유 없이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남영동분실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조사받으며 고려연방제를 찬양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다. 또 언론민주화운동의 배후에 당시 재야정치인 김대중씨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받으면서 숱한 고문을 당했다. 약 한 달간 조사를 받고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9개월 만에 특사로 출소했으나, 1980년 6월에 이미 해직된 상태였다."
당시 <부산일보> 기자 이아무개의 증언은 이렇다.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남영동에 연행되었다. 김대중으로부터 돈을 받았는지를 물으면서 집중 추궁했다. 추궁을 하면서 각목과 발길질로 구타를 했다. 약 25일간 잠도 안 재웠다. 앉아서 조사를 받았다. 너무 괴로워서 (김대중이) 돈 5만원을 주었다고 했다."
진실위 조사 결과에서도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찍혀서' 삼청교육대 강제 입소한 언론인이 35명이나 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전두환은 언론인 해직과정에서 방송사 사장과 기자들을 '순화교육'이라는 미명으로 삼청교육대에 보냈다. 그리고 이를 다른 언론인들에 대한 위협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진실위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언론인을 강제로 순화교육시킨 것은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라고 판단했다. 다음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삼청교육대에 강제 입소된 기자들이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1980년 <대전일보> 기자 이아무개는 삼청교육대 입소과정을 이렇게 진술했다.
"1980년 7월경 본사에서 구두로 사직을 종용했다. 이를 거부하자 사이비 기자라며 삼청교육대 입소대상으로 정했다. 그래서 사직서를 내고 강원도로 도피 중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기에 10월경 자수해 C급으로 판정받아 삼청교육대에 입소했다."
당시 <경남매일> 기자 김아무개는 그때 경험을 이렇게 회상했다.
"군용 유류 1000여 드럼 유출사건 보도와 관련해 1980년 7월 30일 경남계엄분소 군인들에게 연행되었다. 그 후 충무경찰서, 삼청교육대에서 약 29일간 구금되어 구타·협박 등을 당한 뒤 석방되었고, 1980년 8월 31일 강제해직되었다."
또한 당시 <경남매일> 기자 이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1980년 8월경 신문사 사무실에서 보안부대로 연행되어 감금된 상태에서 강제로 사표를 제출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조사 중에 자술서를 쓰도록 강요했지만 쓸 게 없다고 (그냥) 백지를 냈다. 그러자 보안사 수사관이 무릎을 꿇게 하고 구둣발로 무릎과 허벅지를 밟고 걷어찼다. 수사관은 조사 중에 수시로 주먹으로 때렸다.
지하조사실에서 4~5일 조사를 받고 보안부대 내 '체육관'으로 옮겨져서 그곳에서 다시 20여 일간 감금되어 있었다. 남아무개 기자 등이 조사받으면서 지르는 비명을 들었다. 조사관이 '시대의 흐름에 순응해라. 퇴직금을 줄 테니 사표를 내라'고 직접 요구했다. 그리고 '일체 조사 사실을 발설하지 말고 앞으로 입 닫고 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표 쓰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당시 <경남매일> 기자 남아무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보안대에 연행되어 10여 일 정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신문사의 비리에 대해 조사받았다. 그런데 보안대에서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주먹으로 온몸을 구타당했다. 양손을 밧줄에 묶인 채 매달리기 등의 가혹행위를 받았다. 사표를 쓰지 않으면 살아서 여기를 나갈 수 없다는 위협을 받아 사표를 썼다. 이 과정에서 내부협력자가 있었지만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당시 <경남매일> 기자 공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경남 보안부대에 연행되어 감금된 상태에서 보안사 수사관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사표를 제출했다. 처음에 뺨을 계속 때리고, 곡괭이 자루로 가슴을 찌르고 때렸다. 그리고 책상 사이에 머리와 다리를 양측에 걸어 놓고 허리와 머리를 밟고 짓이겼다. 그러다 그 자세에서 머리에 수건을 덮어 놓고 큰 주전자에 담긴 물을 부었다.
또 양측 집게손가락에 전선을 연결하고 군용 수동식 전화기를 돌려 전기고문을 수회 했다. 지금 좌측 광대뼈에 있는 흉터가 그때 고문으로 인한 상처다. 이 모든 계획에 내부협조자로 아무개가 보안사에 협조해 회사의 경영권 찬탈과 이에 반발한 기자들의 명단을 제공한 것이었다."
당시 <강원일보> 기자 장아무개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보안사의 경포대 개발 관련 비리 수사에 대해 기사를 작성해서 밉보였다. 그래서 삼청교육대에 입소해 2주간 곤욕을 치렀다. 결국 정화위원회에 이의를 신청해 무혐의 판단을 받아 석방되었다."
진실위 조사 결과 당시 보안사 요구에 언론사가 불응할 경우 국세청과 감사원을 통한 세무사찰과 경영감사가 계획되어 있었다. 이런 전두환 정권 계엄 하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에서 언론사 사주들은 보안사로 소환돼 보안사 수사관들을 통해 포기각서를 써야 했다. 이 과정에서 보안사 군인이 권총 등을 휴대하거나, 착검해 대기케 해 언론사 사주들을 위협했다.
언론사 사주가 거부시 수사관들은 언론사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하거나 회유했다. 더욱이 언론사 대표가 부재중인 경우에 전두환 정권은 권한이 없는 총무부장 등에게 대리로 각서를 작성케 하는 등 공권력을 위법하게 행사했다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더욱이 언론사 강제통폐합과 기자 강제해직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은 당시 삼청교육대에 충주문화방송 사장이 끌려간 사례를 들어 사주들을 협박했다. 또한 유력 언론사인 <중앙일보> 홍아무개 사장이나 이아무개 회장이 포기각서를 작성한 사례를 들어 사주들의 저항 의지를 꺾었다. 그러면서 전두환은 언론사 통폐합이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을 사주들이 인식하게 만드는 수법을 썼다.
삼청교육대 끌려간 충주문화방송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