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기록편람' 내용
박만순
피가 거꾸로 솟은 김하종은 경주경찰서에 갔다. 그는 정보과 책임자에게 신원기록편람을 들이대며 "경주의 피학살자 나머지 기록도 내놓으시오"라고 했다. 1960년 4.19 혁명 후 유족회에 접수된 경주시와 월성군 피해자가 860명이었다. 미신고된 사람까지 감안하면 한국전쟁기 경주군(현재의 경주시) 피해자는 1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김하종의 추궁에 정보과 형사는 얼굴이 벌게지며 "그런 서류는 없습니다"라고 변명했다. "무슨 소리고?" 김하종은 목소리를 높이며 "내가 교직에 있을 때도 학교 졸업대장은 영구보존인데, 처형자 명단이 없다는 게 말이 되노?"라며 항의했다.
"있긴 있는데, 워낙 오래된 서류라 지하에 있어서 못 찾습니다." 이렇게 정보과 책임자가 버티니 김하종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발길을 향하는 김하종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는 발걸음을 떼며 이를 악물었다. '언젠간 밝히고 말 테야'라고 결심하면서....
2년 동안 집으로 출근한 형사
"김형 계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리니 김하종은 '이제 10시인가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경주경찰서 정보과 임 경사였다. 1963년 12월 16일 민복기 법무장관에 의해 김하종이 잔형 집행면제로 석방된 후 임 경사는 매일 김씨의 집으로 출근했다. 임 경사는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하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경찰서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임 경사는 김하종에게 "김형, 전국 140명 요시찰인에 대한 감시가 정부의 방침이오. 그 가운데 김형도 끼어 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소.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김형도 나를 친구라고 하시오"라고 말했다. 김하종은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 할까봐 임 경사의 신분을 숨겼다. 하지만 아들 친구라는 사람이 매일 찾아와 점심까지 먹어대니 어머니 최일순은 역정이 났다.
"니 친구는 우찌 된 놈이고?"
"와요? 어무이."
"어떻게 된 놈이 매일 와서 점심을 얻어 쳐묵냐. 시골 살림 빤한데 신세를 져도 유분수지!"
2년만에 감시자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최성기였다. 그는 월성군 내남면 노곡동 출신으로 내남면 민보단 반장이었다. 민보단 활동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경사로 특채됐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김하종을 감시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다. "이놈아는 빨갱이라 취직도 몬하고, 장개도 못 갈 거래이." 최성기의 말을 들은 모친 최일순은 집에 와서 대성통곡했다. 그렇게 김하종은 석방 후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4년간이나 했다.
하루에 100 짐을 져나르다
당시 김하종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자본금이 없으니 장사를 할 수는 없고, 결국 야산 2천 평을 개간하기로 했다. 산비탈은 돌 반 나무 반이었다. 지게에 돌을 담아 밭 옆에 쌓았다. 하루에 100 짐을 날랐다. 동네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쟈는 농사도 안 져본 아가 우찌 저리 일을 잘하노?"
개간한 밭에 수박, 참외, 무, 배추를 심었다. 농사는 풍작이었다. 마을 사람들 입이 다시 벌어졌고 소문은 인근에도 퍼졌다. 풍문을 듣고 이채우 전 경주시장(1960.7.13.~1960.12.1. 경주시장 재직)이 김하종을 찾아왔다.
"젊은 사람이 개간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더니 김 선생이었구먼. 일도 안 해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장한 일을 했는교?"
"시장님! 경찰이 옴짝달싹 못하게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인교. 시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제가 지난 합동위령제 때 법을 위반했는교?"
김하종이 말한 합동위령제는 경주유족회가 4.19 혁명 후인 1960년 11월 13일 계림국민학교에서 연 위령제를 말한다. 그 위령제는 경주경찰서의 집회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치렀다. 김하종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교직에 자리가 나 경북교육청엘 갔더니만 중앙정보부 조정관하고 특무대 파견대장이 있더라요. 결국 신원조회에 걸려 교직은 물 건너갔습니데이. 요번에 선생 자리가 또 났는데, 말 좀 해주이소."
"군인도 아닌데, 왜 특무대에서 신원조회를 하노?"
김하종이 이채우 전 경주시장에게 읍소한 지 열흘 후에 최성기 형사가 찾아왔다. "학교 가도 좋소." 김하종은 1964년 12월 19일 동방고등공민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고등공민학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중학교 교육을 하는 학교였다. 당시 고등공민학교는 3년제로, 교육을 이수한 후 국어, 영어, 수학, 국사 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동방고등공민학교는 이후 불국사고등공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