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외교안보정책의 가장 큰 줄기는 '러시아 커넥션'이었다. 2016년 대선후보 당시부터 2020년 2월 상원에서 탄핵이 부결될 때까지 러시아 스캔들, 러시아 커넥션, 우크라이나 게이트는 트럼프와 반트럼프 사이의 연속되는 정치 전쟁이었다.
러시아 스캔들이란 트럼프가 오래 전부터 사업상 러시아와 가깝게 지냈고 러시아에게 약점을 잡혀 친러정책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러시아 커넥션은 트럼프가 과거 사업상의 인연으로 알게 된 러시아 세력을 미국 대선에 끌어들여 힐러리를 낙선시켰고, 그 결과 러시아에 대한 보답으로 트럼프가 반애국적인 대러 정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2019년 4월 특별검사 뮬러의 보고서 이후 러시아 커넥션으로 인한 탄핵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반트럼프 세력은 트럼프 신상 털기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게이트라는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우크라이나 게이트는 트럼프의 친러 정책과 관련이 있다. 미국은 오바마행정부 시절에 동맹사이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에 끼워들어 우크라이나에 친서방정권을 어렵게 세웠다.
우크라이나 게이트는 트럼프의 친러반중정책의 과정에서 촉발된 것
그런데 미국의 주류 세력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문제에 있어 러시아 편에 서고 있다고 의심하던 과정에서 트럼프가 바이든의 제거를 위해 국가안보 문제를 놓고 우크라이나 정부를 압박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다.
미국의 주류 입장에선 트럼프는 이미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완화하였으며, 군사적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중동에서 주도권 다툼을 하는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였다. 즉 트럼프는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에 대한 양보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트럼프는 모든 중거리핵무기를 폐기하도록 하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2021년에 종료되는 전반적인 핵무기 감축협정인 "뉴 스타트(New Start)"의 연장에 대해 미온적인데, 미국의 주류층은 미국의 국가안보에 직결되는 전략무기에 대한 트럼프의 갈지자 행보에 대해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러시아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짐에도 친러정책 내지 러시아에 대한 방임정책을 유지하면서 여론 호도의 방편으로 미국의 주적을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바꿔 설정하였다.
친러노선에 대한 공격을 반중노선 전환으로 방어
미국의 군사적 주적은 러시아이고, 경제적 경쟁자는 중국인 게 사실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점을 활용하여 중국과의 경제전쟁을 부각시키고 러시아와의 군사적 대립을 완화시켜왔다. 미국인에게 미국의 주적은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트럼프의 친러반중정책은 중국과 협조하면서 러시아를 압박하는 미국의 주류 정책과 정반대인 셈이다. 그런데 중국은 아직 군사적으로 미국의 상대가 안 되므로 중국을 주적으로 삼을 경우 미국은 당장 전략무기 증강에 주력할 필요가 없다.
트럼프는 실제로 임기초반에 이례적으로 국방부 예산과 국무부 예산을 삭감하였는데, 이는 미국 주류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트럼프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의 무력긴장을 높이고 있지만 러시아와의 전략 무기 경쟁을 통해 국방예산을 증가시켜야 하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제의 입장에선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미국 주류의 구상은 "굴뚝산업은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게 양보하고 첨단산업과 지식산업을 미국이 지배한다"는 세계분업체제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거꾸로 굴뚝산업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려고 한다. 트럼프의 이런 구상에 대해 미국의 백인노동자들이 환호하였으며, 일부 굴뚝산업이 실제로 미국으로 회귀하였다.
트럼프의 반중정책은 남중국해에서 긴장 심화, 홍콩 문제 개입, 소수민족 독립 지원, 대만과의 접촉 강화, 중국의 인권 문제 부각, 동유럽과 남미 및 아프리카에서 중국과의 진출 경쟁 등 전방위적으로 추진되었다.
트럼프의 갈짓자 외교의 핵심은 '최대압박과 개입'이라는 상술
트럼프 외교안보정책의 두 번째 줄기는 친러반중 정책에서 보듯이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뒤집어 자신의 차별성을 과시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행정부의 쿠바와 베네수엘라 및 이란에 대한 관계개선을 무위로 돌렸고 반대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오바마의 대이란 정책과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비교해보면 트럼프의 친러반중 정책이 대북정책에서 일정한 성과를 불러 일으켰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바마행정부는 미국과 유럽연합 및 이란 사이의 '이란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JCPOA)'를 최고의 외교성과로 삼았다.
미국의 입장에선 JCPOA는 이란이 합의에 나서도록 강제한 수단인데 주요 내용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과 제3자 제재(Secondary Boycott, Third Sanctions)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원유거래 등 이란과의 경제 교류 중단을 강제하니 이란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 압박을 통해 상대방의 양보를 이끌어 낸다는 이러한 정책은 '최대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정책으로 미국의 전형적인 정책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란에 적용한 이러한 정책을 북한에 적용하였다.
대중압박으로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이 일정한 성과를 내
그런데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최대압박과 관여 정책을 적용하지 못하고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에 그친 배경이 있다. 북한은 쿠바와 마찬가지로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가 반세기 이상 단절되었다. 따라서 미국 입장에선 이란과 달리 북한의 경제를 옥죌 특별한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중국을 제외하면 북한이 특별히 대외적 무역관계를 하고 있지 않으므로 제3자 제재 역시 실효가 없다. 미국 입장에선 제3자 제재가 성공하냐는 오로지 중국에 달려 있는 셈이다. 부시정권 시절 미국은 마카오의 중국계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자금을 동결한 적이 있었는데, 북한에 실제적인 타격을 주었다.
북한은 'BDA 문제의 우선적 해결'을 요구하며 9.19 공동성명 이행을 거부하고 2006년 7월 5일 미사일 시험발사, 같은 해 10월 9일 첫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벼랑 끝 전술로 맞섰다. 결국 양측은 협상에 나서 미국이 BDA 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북한은 당분간 미국을 자극하지 않았다.
방코델타아시아에서 보듯이 중국의 북한에 대한 세컨더리 제재는 효과적
이처럼 중국의 북한 제재는 북한에게 위협적이었는데, 문제는 중국이 북한에게 치명적인 제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입장에선 중국이 북에게 치명적인 제재 즉 원유 공급 중단, 국경에서 민간인 무역의 단속을 하도록 강력한 압박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바마행정부에서는 미중관계를 고려하여 중국에 대한 극단적인 압박을 피해왔다.
반면 트럼프는 반중정책을 하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극단적인 압박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중국은 미국의 압박으로 북한에게 상당한 제재를 하였다. 트럼프는 군사적으로도 북한을 압박하고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는데, 이 역시 정상회담에서 양보를 노리는 최대압박과 개입정책의 일환이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해서는 쿠바미사일사태 이후 소련과의 협정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군사적 공세를 할 수 없다. 이란에 대해서도 이슬람 국가들의 반미정서로 인해 역시 직접적인 군사적 공세를 할 수 없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아직도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고, 남북 대립을 명분으로 군사적 공세를 할 수 있다. 즉 북한에 대한 최대압박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가능하고 트럼프는 핵전쟁 공포까지 감수하면서 이러한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쿠바·이란과 달리 북한에 대한 군사적 최대 압박은 지정학적으로 가능
트럼프는 장사꾼으로서 평상시에도 압박과 타협 능력을 과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한 북한 압박이 북미간의 대타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즉 이란에 통했던 최대압박과 개입 정책이 북한에도 통할 것이기 때문에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그 성과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트럼프는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북미간의 근본적 타결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기관리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북한에 대한 최대압박과 개입정책에 대해 기존 정치권은 처음에는 별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무시하였다.
하지만 전쟁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는 무모하다고 보았으며, 정상회담이 진행되자 한편으로 시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양보하거나 북한 체제만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비난하였다.
바이든의 대북정책은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압박에 의존
반면 수미 테리와 같은 외교 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최대압박과 개입정책의 방향이 옳았지만 너무 빨리 최대압박을 포기하고 정상회담으로 나아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외교 전문가들은 바이든에게 북한이 전략적인 양보를 할 때까지 충분히 압박한 이후 협상에 나서도록 조언할 가능성이 높다. 즉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을 목격한 바이든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보다는 이란식의 최대압박과 개입정책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바이든과 그 참모들이 트럼프가 한 정상회담을 바이든행정부에선 불가능하다고 공언할 정도가 외교적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략적 인내와 최대 압박의 환상적 조합은 없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이 핵무장을 스스로 포기할 정도의 압박은 북한이 붕괴될 정도의 전면적인 제재 즉 원유공급의 전면적인 중단, 민간교류의 금지를 중국이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의 현재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중국의 국가안보이므로 중국은 미국의 요구에 응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극단적인 조치로 중국과 맞선다면 중국과 관계개선을 하고 주적을 다시 러시아로 회귀시킨다는 기본 방침이 훼손된다.
바이든행정부는 중국 및 북한과의 관계에서 전략적으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는 셈이다. 반면 중국은 트럼프행정부에 비해 바이든행정부에서 외교적으로 운신할 폭이 넓어지게 된다. 문재인정부의 후반기 외교안보전략의 성패는 바로 이 중국의 확장된 외교 선택의 폭을 어떻게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대처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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