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길영희 교장은 1950년대 후반 서울에서 명성을 떨친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을 둘러본 후 독립 건물로 도서관을 지었다. 경기고 교장이었던 김원규와 길영희는 평양고등보통학교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동문이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중등교육의 선구자인 동시에 한국 학교도서관 분야 선각자다.
백창민
무감독 시험, 완전 개가제 도서관뿐 아니라 제물포고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규율부를 두지 않는 무규율부 제도, 학생이 주관하는 전교생 월례 조회, 운동부를 두지 않고 전교생이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학생 글만 싣는 교지까지⋯. 제고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무감독 시험과 함께 무규율부와 무운동부 제도는 제물포고의 '3무'(三無)로 꼽혔다. 제물포고등학교의 개교가 '한 학교의 개교'가 아닌 한국 중등교육이 나아갈 바를 정한 '혁명적 개교'였다는 평가가 여기서 나온다.
1961년 대학 입시에서 제물포고는 서울대 전체 수석과 여러 단과대 수석을 휩쓸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제물포고등학교는 전국구 명문 '제고'가 되었다. 길영희는 제자들이 단순한 인재가 아닌 혼탁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랐다. 교모 배지를 빛과 소금으로 도안하고, 교훈을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으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 덕분일까? 제고는 교훈에 걸맞은 인재의 요람이 되었다.
제물포고등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도서관 앞에 있는 강당, '성덕당'(成德堂)이다. 성덕당은 1935년 인천공립중학교 개교와 함께 지은 건물이다. 기둥을 세우지 않고 15m 너비의 공간을 확보한 것이 특징이다. 성덕당은 인중-제고 학생뿐 아니라 인천 지역사회의 대형 집회 공간으로 자주 쓰였다. 길영희 교장이 함석헌, 유진오, 백낙준, 현상윤 같은 당대의 석학을 강사로 초빙해, 학생과 시민에게 청운의 꿈을 길러준 공간이다.
성덕당 양쪽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 흐르는 땀이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 "위선최락(爲善最樂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이라는 사자성어가 내걸려 있었다. 조회 때 인중과 제고 학생은 이 말을 구호처럼 외쳤다. 길영희 교장이 늘 강조한 이 문구는 그의 묘비에도 새겨졌다. 인중과 제고 제자 중에는 성덕당 훈화 과정에서 터진 길 교장의 '사자후'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성덕당은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한국 도서관에 미친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