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에서 캔 냉이 우리의 무기력증을 구해 준 냉이 캐기
변영숙
엄마는 양주 대모시에 있는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으로 직행해서 호미부터 챙겼다.
"냉이 캘 때에는 호미가 뾰족해야 돼."
이것저것 들어보다가 맘에 드는 것을 골라 들고 밖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의 거침없는 행보였다. 순간 살짝 눈물이 맺혔다. 저렇게 신나 하는데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몹쓸 병 때문에 꼼짝없이 집에 갇혀 지내야 하는 엄마가 너무 짠했다.
"누가 벌써 한 축 해 갔네."
내 눈에는 냉이의 냉자도 보이지 않는데 엄마는 벌써 밭을 한눈에 다 둘러본 모양이다. 요즘은 시골이라고 빈 밭이라고 어디나 냉이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시골에 냉이가 지천이라는 말도 다 옛말이다. 농가 깊숙이까지 공장이 들어선 시골 풍경은 이미 낯설기 그지없다.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들이 살던 아랫집 윗집은 높은 공장 담벼락에 가로막혔고, 얼굴도 모르는 낯선 외지 사람들이 휘젓고 다니고, 경운기 지나던 호젓한 시골길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냅다 달리는 화물차 차지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던 돌담길은 공장 부지라며 아예 없애 버렸다. 공장에서 밤새 켜 놓은 가로등 불빛 때문에 콩이 자라지 않는다는 하소연도 심심찮게 있었다. 얼마 전에는 집 앞의 논을 다 갈아엎고 밭을 만들어 놓았다.
그 땅에 무엇이 들어설지 유심히 관찰 중이다. 할머니 집 마당에서 가을이면 누런 황금색 들판을 바라보며 마냥 좋아하던 시절도 모두 옛말이다. 원주민들이 쫓겨나다시피 고향을 등지는 현실이 우리 시골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누가 해 갔을까? 남의 밭에서 냉이 캐 가면 도둑질 아니야?"
"감자나 고구마처럼 주인이 심은 것이 아닌 것들은 훔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도 남의 밭에서 냉이 해 왔잖니?"
그러고 보니 우리도 예전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냉이를 해 온 적이 있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내 것 네 것 챙기려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길이 나의 사유지를 지난다며 수백 년 동안 있어 왔던 길을 하루 밤 사이에 막아버리는 세상에서는 참 '고리타분' 하게 말이다.
엄마는 바로 전투 모드로 돌입해서 냉이를 캐기 시작했다. "냉이라고 다 잔챙이라서 다듬으면 먹을 것도 없겠네" 하면서도 고개도 들지 않고 열심히 캤다. 간만에 엄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시골에 오면 엄마는 물 만난 고기처럼 팔팔해지고 농사일이며 다른 일들도 척척박사였다. 거리낌 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그런데도 여간해서는 오지 않으려고 했고, 심지어는 시골집에 오는 것이 싫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가난한 시골집에서 태어나서 죽어라고 고생만 했는데 뭐가 좋겠니?"
엄마가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시시콜콜 말은 안 했지만 그 상황을 모를 바도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시골의 가난한 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엄한 시부모 밑에서 대가족 건사하면서 살아야 했던 시절이 오죽 힘들었을까. 엄마보다 어린 고모 삼촌이 셋이나 있었다면 말 다한 것이 아닐까.
애잔한 엄마의 육신... 다시 찾은 활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