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군의 대장정장정(長征)은 중국공산당 홍군(紅軍)이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370일에 걸쳐, 12,500km의 거리를 이동해서 옌안으로 탈출한 사건이다. 대서천(大西遷) 또는 대장정(大長征)이라고도 한다. 11개 성과 18개 산맥, 24개 강을 가로지른 장정의 생존자는 그 자체로 신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Wikimedia
화려한 경력을 지닌 무정이지만 그는 '연안파'의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 조선독립동맹 시절 무정은 ML파 핵심인물인 최창익과 대립했고, 만주에서 넘어온 박일우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방 후 북한 입국을 앞둔 시점에서 무정은 선양(瀋陽)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국민당 군대가 진격해오자 무정은 측근만 거느린 채 트럭으로 선양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 동료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옌안에서 활동한 조선독립동맹(연안파)은 그 자체로 항일을 위한 통일전선 조직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연안파로 분류되는 김창만 같은 사람은 해방 후 김일성과 함께 정치 노선을 함께 하기도 했다. 명성과 높은 지식 수준, 무력까지 갖춘 연안파는 해방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 중 하나였지만, 김일성이 이끈 만주파에 비해 결집력이 약했다.
한편 김영숙은 중국에서 '난영'(蘭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는 일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중국 이름을 사용했다. 중국 정부가 그렇게 종용하기도 했다. '난영'이라는 이름도 이런 상황에서 지은 이름일 것이다.
해외에서 활약한 다른 혁명가도 마찬가지였다. 윤세주는 석정, 최창익은 이건우, 한빈은 왕지연, 허정숙은 정은주, 박차정은 임철애, 김홍일은 왕웅, 조봉암은 박철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무정 역시 마찬가지다. 무정 또는 김무정이라 불린 그의 본명은 김병희(金炳禧)다.
함경북도 출신 김영숙이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일본말을 상당히 잘 했다. 충칭(重慶)에 머물 땐 일본어 방송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중국에서 오래 활동했기 때문에 조선어, 일본어 외에 중국어에도 능통했을 것이다.
'대장정'을 통해 옌안(延安)에 도착한 홍군은 1936년 6월 1일, 이전부터 있던 홍군대학을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으로 확대해서 개편했다. 교장은 린뱌오(林彪), 정치위원은 마오쩌둥, 교육장은 뤄루이칭이 맡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예젠잉(葉劍英), 장원텐(張聞天)이 직접 교수로 나섰다. 중국공산당이 얼마나 이 대학에 관심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옌안에서 싸운 조선 여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