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간호협회 광고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캠페인을 벌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34인의 간호사와 간호 학생을 기억하자는 내용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윤익선, 이범승, 이긍종, 이묘묵 같은 ‘친일 도서관인’ 외에 ‘독립운동을 벌인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대한간호협회
1924년 2월 꼬르뷰로가 해산하자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고려도서관'에서 관장으로 일했다. 신한촌은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 말 그대로 한인이 꾸린 새로운 마을이었다. 고려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조선 땅에서 해외 동포 위문을 목적으로 보내온 백과사전과 책을 바탕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교육구국운동을 펼친 성재가 도서관을 통해 그 행보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 신한촌에서는 1910년대부터 '도서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대동공보>가 발행금지를 당하자 한글 신문 <대양보> 발간을 준비했다. 신개척리에 <대양보> 발행소를 새로 지으려 한 최재형은 건물 일부를 '도서관'으로 계획했다.
러시아 연해주뿐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사례가 있다. 송재 서재필과 성엄 김의한, 김영숙(난영)은 해외 도서관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초까지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짓지 않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펼쳤다. 이동휘가 신한촌에서 도서관을 운영할 무렵, 조선 땅에 도서관은 흔치 않았다.
타국을 정처 없이 떠돈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흔적이라 이동휘의 사례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를 '도서관인'으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학교와 도서관을 기반으로 펼친 성재의 구국운동은 '해외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조선인의 '해외 도서관 운동사'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할 대목이다.
'도서관인'으로 스스로 인식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던 그들에게 정규 도서관 교육을 받았는지, 도서관인으로 자각했는지 묻는 것은 사치스러운 질문 아닐까? 도서관인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도서관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무대'요, 또 다른 '무기'였다.
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학교는 제법 알려졌지만 도서관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 문헌정보학은 우리 땅에 명멸한 도서관 위주로 관심을 가져왔지만,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한 도서관 역사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에서 '속인주의'(屬人主義)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은 한국 도서관사 연구의 과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인 34인을 기념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 독립운동 전선에서 빛나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데 이어 신문광고를 했다. '독립운동가 간호사들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러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도서관을 무대로 펼쳐진 독립운동'은 없었을까? 이동휘 사례처럼 도서관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