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덕수궁 석어당. 폐위된 직후에 쿠데타군에 끌려 덕수궁에 간 광해군은 이곳에서 젊은 계모인 인목대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김종성
인목대비는 김제남의 딸로 19세 때 51세 선조의 왕비에 책봉되어 4년 뒤 영창대군을 낳아 선조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선조의 뜻에 따라 세자인 광해군을 폐하고 적통(嫡統)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던 영의정 유영경의 권유를 뿌리치고 영창대군이 아직 어리니 광해군으로 잇게 하라는 한글 교지를 내렸다. 인목대비로서는 천추의 한을 남긴 실수를 한 것이다.
왕권이 넘어간 뒤 인목대비는 광해군 5년 서궁에 갇히면서 대비에서 서인(庶人)으로 신분이 낮아지는 수모를 겪다가 10년 후 인조반정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허균은 '보명득의' 시절을 즐긴 것인가, 권력에 도취한 것일까. 이제까지 살아온 행로나 자신이 쓴 글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집권세력인 대북파에 속하면서부터 벼슬길이 순탄했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인목대비의 폐위에 앞장 선 것이다.
허균은 이 기회에 광해군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그동안 끌어모은 자기의 심복들에게 폐비를 주창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허균의 궁극적인 목표가 대비를 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사를 준비하는 동안 남들에게 의심받지 않으려면 폐비론에 앞장서야 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허균의 집에 몰려들어 먹고 잤으며, 역시 허균의 심복이었던 이재영이 이들의 소를 지어주었다. (주석 1)
그의 인목대비 폐출론은 여러 가지 해석과 추정이 따른다. 살기등등한 시절에 살아남기 위한 '보명'의 수단, 고위직에 올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득의'의 연장술, 그리고 이이첨의 이용물, 마지막으로 모종의 목표(집권 또는 군왕교체)를 위한 수단 등이 그것이다.
이이첨의 이용물이 된 균이 그 본심이 아닌 행동에 세인들의 의혹도 있었으나 이로부터 그의 무기인 문장과 학술로써 광해 육칠 년에 두 번씩이나 중국에 드나들면서 활약하여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기에 성공하여 일약 재상의 반열에 이르러 세론에 요지부동의 터전을 만들고 일방 자기가 두둔하던 인목대비를 도리어 폐위함을 극론하고 이를 반대하는 무리를 호역의 당이라 몰아쳐 죄상을 감추려 하였던 것이다. (주석 2)
그는 경박하다는 평이 따랐으나 비굴하거나 음모를 꾸미는 등 책사의 품성은 아니었다. "점점 자라면서 익혔던 것들도 자질구레한 기예(技藝)였을 뿐 취할 것이 없었으며, 남을 비웃고 잘잘못을 가려 남의 이목을 유쾌하게 하는 데만 힘쓰느라 저도 모르게 경박한 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일찍이 등과하여 공명을 손쉽게 얻으리라 여기고는, 옷소매를 떨치며 자신만만하게 당돌하고 촉오(觸忤)하여 죄와 허물을 쌓았으니, 옆에서 보는 자가 노리고 있었을 것은 사실입니다." (주석 3)
우리 속담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거니와 그의 진정한 속내를 헤아릴 순 없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지은 문인도 변절하고, 학생ㆍ재야의 민주화운동가들이 군사독재와 그 아류 부패정권에 빌붙어 하는 행동을 보면 새삼 인간의 이중성을 찾게 된다.
옆에서 그를 노리는 자가 많았다. 글 재주에, '득의'에, 불교 숭배에, 이탁오를 닮는 모습에서 그를 시기ㆍ혐오ㆍ배척하는 자(세력)가 많았다. 도처에 널려 있었다.
주석
1> 허경진, 『허균 평전』, 342쪽.
2> 정주동, 『홍길동전 연구』, 문호사, 1961.
3> 허균, 「이대중에게 보낸 첫 번째의 글」, 『성수부부고』,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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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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