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혜화1117
그는 책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를 통해 딜쿠샤 복원 작업 과정을 풀어냈다. 그의 촘촘한 복원기를 읽다 보면, 딜쿠샤라는 낯선 공간이 입체적으로 눈 앞에 펼쳐진다.
우산꽂이부터 서양인들의 '영혼'이라고 일컬어지는 벽난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 하듯 해외 경매 사이트 등을 뒤지며 딜쿠샤의 원형에 가까운 물건과 가구들을 찾아낸 필자의 끈질긴 노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설 수 없는 세월의 한계가 있는 법. 그는 재현할 수 없는 부분들은 새롭게 상상하거나, 공백으로 두며 2021년 버전의 '딜쿠샤'를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딜쿠샤의 비어 있는 서사는 이 공간에 얽힌 이야기와 거쳐간 사람들의 역사로 채워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딜쿠샤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나 이 집을 지은 앨버트 테일러·메리 테일러 부부가 그렇다. 딜쿠샤에 큰 애착을 가졌지만 결국 조선을 떠나야만 했던 테일러 부부의 삶에선, 당대의 역사를 동시에 읽어낼 수 있다.
죽어서도 조선 땅에 묻힌 남자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1897년 처음 조선 땅을 밟은 미국인이었다. 그는 출장차 방문한 일본에서 영국인 연극배우 메리 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혼에 골인한 둘은 조선에 정착하게 되는데, 당초 테일러 부부가 처음으로 신접살림을 꾸린 곳은 딜쿠샤가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신혼 생활을 시작한 건 서대문 근처, '그레이 홈'이라는 이름을 붙인 집이었다.
그레이 홈에서 첫 아이를 낳고 살던 메리 테일러는 어느 날 한양 도성을 걷다 행촌동에 있는 언덕, 그리고 큰 은행나무 한 그루에 매료된다. 마침 마음에 드는 터가 매물로 나온 걸 확인한 테일러 부부는 이곳에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딜쿠샤의 시작이다.
확고한 취향, 그리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탄탄한 재력까지 지니고 있었던 두 부부는 당시 조선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서양식 건축물인 '문화주택' 형태로 집을 짓고, 공간을 채워나간다. 이들 부부는 경매와 골동품상을 통해 하나씩 수집한 물건과 가구들로 거실과 방을 꾸몄는데, 지금 봐도 동서양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이는 인테리어다.
하지만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과 달리, 딜쿠샤에서의 행복한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신성하고 영엄하다는 은행나무 주변 터에 외국인이 집을 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집안에 악운이 내리고 화마가 집을 삼킬 것'이라는 무당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딜쿠샤를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인 앨버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몸져 눕는다.
결국 테일러 부부는 앨버트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사이 딜쿠샤는 낙뢰를 맞아 2층이 전소되고 1층 일부가 불타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 1929년 9월, 우여곡절 끝에 이들 가족은 다시 딜쿠샤로 돌아오지만 1942년 조선 땅을 또 한 번 떠나게 된다.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 때문이었다.
사실, 앨버트는 금광과 '테일러 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연합통신사(AP통신)의 해외통신원 등으로 활동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입수, 동생인 윌리엄을 통해 이 소식을 AP통신 본사에 타전한 장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 황제의 국장 모습을 촬영하고, 이후 일어난 수원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는 등 급변하는 조선의 소식을 해외에 발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일본 경찰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 땅을 떠나야만 했던 앨버트 테일러는 해방 이후 다시 딜쿠샤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48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아내 메리는 그해 9월, 조선에 와 앨버트의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는다.
'말쑥한 딜쿠샤'의 딜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