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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나오는 집'이라 부른, 행촌동 1-88번지의 정체

[책줍일기] 최지혜 지음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등록 2021.04.23 14:29수정 2021.04.2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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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기자말]
영흥주택, 태양빌라, 현대빌라, 은행주택...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흔하고 친근한 이름의 다세대 주택과 빌라가 촘촘히 밀집한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이곳을 걷다 보면 언덕 위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집, 어째 좀 낯설다. 벽돌로 십자 무늬 패턴을 표현한 테라스, 세로로 길쭉한 하얀색 아치형 창문, 그리고 데칼코마니 형태의 대칭 구조까지. 이 동네의 그림체와는 영 맞지 않는 이국적 모양새를 지닌 주택의 정체는 바로 '딜쿠샤'다. 


이름까지 특이한 이 집은, 산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살던 서양인 부부가 지은 주택으로, 한국에서 건축된 초기 서양 근대주택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딜쿠샤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됐다. 이곳에서 20여 년간 살았던 서양인 가족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집주인이 바뀌고, 건물 구조가 변경됐다. 또,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내부와 외관도 많이 낡았다. 

그러던 중 지난 2016년 2월 서울시, 문화재청, 종로구 등이 '딜쿠샤 보존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본격적인 복원에 나섰다. 곧이어 2017년 8월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약 2년 간의 공사를 거친 딜쿠샤는 원형 복원돼 지난 3월 1일 대중에 공개됐다. 

딜쿠샤 복원의 '키'를 잡은 건 덕수궁 석조전 복원 사업 등에 참여한 바 있는 최지혜 국민대학교 겸임교수다. 미술사학자이자 서양 앤티크·근대 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인 그는, 딜쿠샤의 주인이었던 메리 테일러가 남긴 기록과 단 6장의 흑백 사진을 바탕으로 100여 년에 이르는 세월을 뛰어넘어 '딜쿠샤'의 원형을 재현해냈다.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혜화1117
 
그는 책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를 통해 딜쿠샤 복원 작업 과정을 풀어냈다. 그의 촘촘한 복원기를 읽다 보면, 딜쿠샤라는 낯선 공간이 입체적으로 눈 앞에 펼쳐진다.

우산꽂이부터 서양인들의 '영혼'이라고 일컬어지는 벽난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 하듯 해외 경매 사이트 등을 뒤지며 딜쿠샤의 원형에 가까운 물건과 가구들을 찾아낸 필자의 끈질긴 노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설 수 없는 세월의 한계가 있는 법. 그는 재현할 수 없는 부분들은 새롭게 상상하거나, 공백으로 두며 2021년 버전의 '딜쿠샤'를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딜쿠샤의 비어 있는 서사는 이 공간에 얽힌 이야기와 거쳐간 사람들의 역사로 채워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딜쿠샤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나 이 집을 지은 앨버트 테일러·메리 테일러 부부가 그렇다. 딜쿠샤에 큰 애착을 가졌지만 결국 조선을 떠나야만 했던 테일러 부부의 삶에선, 당대의 역사를 동시에 읽어낼 수 있다. 


죽어서도 조선 땅에 묻힌 남자 

앨버트 테일러는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1897년 처음 조선 땅을 밟은 미국인이었다. 그는 출장차 방문한 일본에서 영국인 연극배우 메리 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혼에 골인한 둘은 조선에 정착하게 되는데, 당초 테일러 부부가 처음으로 신접살림을 꾸린 곳은 딜쿠샤가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신혼 생활을 시작한 건 서대문 근처, '그레이 홈'이라는 이름을 붙인 집이었다. 

그레이 홈에서 첫 아이를 낳고 살던 메리 테일러는 어느 날 한양 도성을 걷다 행촌동에 있는 언덕, 그리고 큰 은행나무 한 그루에 매료된다. 마침 마음에 드는 터가 매물로 나온 걸 확인한 테일러 부부는 이곳에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딜쿠샤의 시작이다. 

확고한 취향, 그리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탄탄한 재력까지 지니고 있었던 두 부부는 당시 조선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서양식 건축물인 '문화주택' 형태로 집을 짓고, 공간을 채워나간다. 이들 부부는 경매와 골동품상을 통해 하나씩 수집한 물건과 가구들로 거실과 방을 꾸몄는데, 지금 봐도 동서양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이는 인테리어다.

하지만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과 달리, 딜쿠샤에서의 행복한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신성하고 영엄하다는 은행나무 주변 터에 외국인이 집을 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집안에 악운이 내리고 화마가 집을 삼킬 것'이라는 무당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딜쿠샤를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인 앨버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몸져 눕는다.

결국 테일러 부부는 앨버트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사이 딜쿠샤는 낙뢰를 맞아 2층이 전소되고 1층 일부가 불타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 1929년 9월, 우여곡절 끝에 이들 가족은 다시 딜쿠샤로 돌아오지만 1942년 조선 땅을 또 한 번 떠나게 된다.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 때문이었다. 

사실, 앨버트는 금광과 '테일러 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연합통신사(AP통신)의 해외통신원 등으로 활동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입수, 동생인 윌리엄을 통해 이 소식을 AP통신 본사에 타전한 장본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 황제의 국장 모습을 촬영하고, 이후 일어난 수원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는 등 급변하는 조선의 소식을 해외에 발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일본 경찰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 땅을 떠나야만 했던 앨버트 테일러는 해방 이후 다시 딜쿠샤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48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아내 메리는 그해 9월, 조선에 와 앨버트의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는다. 

'말쑥한 딜쿠샤'의 딜레마 
 
 촘촘한 복원기를 읽다 보면, 딜쿠샤라는 낯선 공간이 입체적으로 눈 앞에 펼쳐진다.
촘촘한 복원기를 읽다 보면, 딜쿠샤라는 낯선 공간이 입체적으로 눈 앞에 펼쳐진다.혜화1117
  
주인을 잃은 딜쿠샤도 여러 차례 부침을 겪으며 이전과 다른 의미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한국전쟁 이후엔 피난민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했고, 한때 국회의원이 매입했다가 1963년에 이르러선 소유권이 국가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여러 세입자가 거쳐 가며 원형을 점점 잃었다. 때문에 지역 주민들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곳을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그런 딜쿠샤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2016년부터다. 문화재청과 지자체가 나서면서 복원 사업이 탄력을 받았고, 테일러 부부의 후손들이 딜쿠샤와 관련한 자료 1000여 점을 기증하며 속도가 붙었다. 그 결과, 102번째 삼일절에 맞춰 복원된 딜쿠샤를 선보일 수 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앨버트 테일러에게, 여러 모로 의미 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딜쿠샤는 "집을 설계한 건축가의 작품도, 이 집에 살았던 훌륭한 위인을 기리는 공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의미를 그저 '과거 서양인 부부가 살던 집'이라고 축소할 수 없는 이유는, 이처럼 현재의 바탕이 된 과거의 시간이 녹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새롭게 재현한 딜쿠샤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딜쿠샤는 테일러 부부가 살던 당시의 모습을 기준으로 복원된 터라, 그 이후 시기 딜쿠샤를 '거쳐간' 이들의 흔적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을 읽으며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머물던 시절의 딜쿠샤, 그리고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까지 이곳에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했다. '훼손'도 일종의 역사적 기록일 수 있는데, '원형'을 살리면서 지워진 부분이 있다는 점이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실제 한겨레는 지난 16일 <복원된 서양주택 '딜쿠샤'… 그 말쑥함에 100년 역사 무색>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통해 "딜쿠샤 역사에서 미국인 가족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을 함께했던 서민들 삶의 이야기는 완전히 소거돼 버렸다. (중략) 이제 그 기억을 떠올릴 만한 어떤 것도 지금의 말쑥해진 딜쿠샤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근대 건축물은 어디서부터 복원의 기점과 기준을 잡아야 할 것인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저자는 책에서 딜쿠샤가 "공간 그 자체를 기억하는 박물관"이자, "피지배의 역사, 전쟁과 독재, 개발지상주의의 시대를 거치며 수많은 시간을 이겨낸 공간이자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의 대선배 격인, 진본성이라는 개념이 확장된 의의를 지닌 곳"이라고 설명했다.

생략된 '수많은 시간'도 함께 복기한다면, 딜쿠샤는 좀 더 풍부한 기억을 지닌 '박물관'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테일러 부부가 살던 딜쿠샤를 성실히 재현하려던 저자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내면서, 동시에 아쉬운 마음을 덧붙여본다.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 근대 주택 실내 재현의 과정과 그 살림살이들의 내력

최지혜 (지은이),
혜화1117, 2021


#책줍일기 #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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