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즈에 대한 두려움과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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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비만, 건강검진에서 단 한 차례도 이 단어와 떨어져 살아본 적 없다. 체중감량은 해봤어도 비만인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120kg의 몸과 살아간다. 이 사이즈로 살아온 삶에는 많은 사회적 요령과 체념의 순간, 상처의 흔적이 있다.
사람들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답답함과 아둔함, 더러움의 상징을 몸에 새기고 살아간다. 이것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실제로 이 거대한 몸 곳곳에는 튼 살 자국이 있다. 두꺼운 허벅지살 마찰로 인해 사타구니에는 수시로 피부염이 생겼다. 딱지를 뜯고 상처가 낫기를 반복하는 동안 사타구니에는 검게 색소침착이 생겼다.
"Love yourself" 따위의 생각은 내가 내 몸을 보면서도 들지 않는다. 아니, 사랑하는 건 둘째치고 끔찍해서 도저히 보지 못한다. 그래서 6년째 정면 나체를 외면하려 몸을 옆으로 돌리고 거울 프레임 밖에서 샤워하고 있다.
거대한 몸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체념도 만들었다. 이런 몸으로는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안다. 몸 하나로 관계까지 따지냐고 하겠지만 비만인의 몸은 그렇다. 비만인은 약간의 빈틈만 생겨도 비난받기 딱 좋다.
길에서 음식을 먹는 상황, 버스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 달릴 때 숨이 차는 상황, 엘리베이터에 애매하게 자리가 남아있는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어쩌다 단체복을 맞추거나 옷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때부터 손에 땀이 찬다.
사소한 상황에도 비난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관계에도 머뭇거렸다. '나 같은 몸이 호감을 표해도 되는 걸까', '이런 몸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수치스러운 고민도 했다. 부끄럽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 같은 '비만인'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몸이나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온갖 담론을 주워 담은 논문은 밑줄 치며 읽지만, 정작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려 애쓴다. 록산 게이가 그러했듯 그런 주제로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곧잘 재담꾼이 되곤 했다.
얼른 분위기를 환기하고 다른 주제로 웃게 해서 사이즈라는 주제가 잊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레 내 몸으로 시선이 집중될 테니 말이다. 비만인을 둘러싼 주제를 회피하는 효과적인 전략을 쌓으며 살아간다.
2. 모순된 욕망 : 페미니스트, 사회에 부합하고 싶은 욕망
-그러나, 나는 페미니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