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몽유적지 토성작은 돌을 약간 함유한 흙을 쌓고 다지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하게 조성된 3.8킬로의 토성은 잔디와 풀이 덮여 있어 걷기에 좋다.
황의봉
내가 주목한 건 유적지를 둘러싼 토성(土城)이다. 자갈을 약간 함유한 흙을 쌓고 다지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한 강도로 쌓은 이 토성은 작은 내성과,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언덕과 하천을 따라 축성한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외성은 그 길이가 15리(6㎞)에 이른다고 전해졌으나 측량조사 결과 3.8㎞로 파악됐다. 이 외성으로 둘러싸인 면적은 약 23만여 평으로 꽤 넓다. 지휘부의 거처였을 것으로 보이는 내성은 둘레 750m의 정사각형으로 현재 발굴조사작업 중이다.
오늘 이 토성길을 모두 걸었다. 복원작업이 완료된 토성은 잔디와 풀로 덮여 걷기에 좋다. 경사진 비탈을 5미터 정도 올라가면 토성 꼭대기다. 토성 정상부는 폭이 거의 3m에 달할 만큼 넓어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토성은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진입을 허용한 구간은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토성 위로 올라갈 수 없게 금지한 구간은 토성 아래로 난 길을 걸으면 된다. 토성은 중간중간 끊어진다. 대개는 100∼200m쯤 토성이 이어지다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곤 한다.
오랜만에 토성 위에 올랐다. 넓은 시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제주 시내와 제주도의 북서부 바다, 그리고 멀리 추자도까지 보이고, 뒤로 돌아서면 한라산도 보인다. 토성 주변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거나 귤밭이거나 차밭이다. 민가도 드물게 있고, 절도 보인다. 동서 양편에 하천도 흐르고 있어 천연의 요새에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토성길을 걸으며 삼별초가 아닌 제주 민초들의 편에서 당시를 상상해본다. 이 토성을 삼별초 군사들만의 힘으로 쌓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제주 백성들의 피와 땀이 뿌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삼별초의 대의에 공감해서 자발적으로 나섰을까, 아니면 뭍에서 온 새로운 권력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했을까.
김통정 장군은 왜 이곳 애월읍 고성리 일대를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을까. 전시관에서 보여주는 자료를 보니, 여몽 연합군이 쳐들어올 루트로 예상한 함덕포와 명월포의 지세를 고려하여 그 중간지역인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삼별초가 버틴 기간은 2년 반이었다.
삼별초가 패배한 후 제주의 민중들은 무려 100여 년을 몽골에 시달려야 했다.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직접 제주를 지배한 몽골 세력이 제주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1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1374년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제주도에서 목호(牧胡:몽골의 목자)의 난을 토벌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주인들은 몽골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00년의 고통
이 100년 동안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지로, 일본과 남송 공략을 위한 전략기지로 이용됐다. 한 세기에 걸친 몽골의 지배를 겪으면서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까. 그때의 영향일지 모르겠으나 제주어에는 우리말 어감과는 다른, 매우 낯선 느낌을 주는 어휘들이 간혹 보인다. 특히 말과 관련된 용어에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제주의 전통음식으로 자리 잡은 고소리술과 빙떡, 상애떡 등도 몽골 지배의 흔적이다.
나만의 토성길 걷기 코스를 오늘 완성했다. 항몽순의비가 서 있는 제단 뒤쪽으로 돌아가면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정자가 나온다. 이 정자에서 저 아래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토성이 나온다. 여기가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