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 신익희(1894~1954)
(사)해공신익회선생기념사업회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그때는 민의원이라 호칭)를 앞두고 자유당은 2인자로 내세운 이기붕을 차기 국회의장으로 뽑고,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추진하고자 국회를 자당 일색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었다.
제2대 국회가 무소속 의원이 많아서 골머리를 앓았던 이승만은 선거법을 바꿔 정당공천제를 실시하였다. 자유당 당원은 당총재 이승만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고 당선되면 개헌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공천을 받았다.
뉴델리 밀회공작이 허사로 돌아가면서 자유당은 신익희를 낙선시키는데 온갖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에서 입후보 등록을 마쳤다. 그런데 자유당은 대항마로 최인규를 출마시켰다. 1960년 3ㆍ15 부정선거를 지휘하고 4ㆍ19혁명 후 처형당한 내무장관 바로 그 인물이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는 6년 뒤 3ㆍ15 부정선거의 예고편이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선거 운동이 벌어졌다. 제헌국회 때부터 수행하였던 인사의 증언이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해공은 고향인 광주에서 출마하였다. 그런데 광주 국회의원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짜놓은 일정표에 따라 지정된 강연회장으로 나가 보면 청중이 없었다. 그래서 청중이 모이기를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다가 텅 빈 운동장 연단에 서서 창공을 향하여 지정된 20분 동안 선거 연설하고 돌아서고는 하였다. 이것이 매일 되풀이되는 행사요, 또한 동서고금에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입후보자의 선거 강연이었다.
투표 날짜를 수일 앞둔 5월 어느 날 대왕면 유권자에게 행할 선거 강연이 대왕면 세곡리 대왕국민학교 교정에서 있었다. 이 곳 강연회장도 다른 면(面)과 다를 바 없이 단 몇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운동장 가장자리 미루나무 밑에서 서성거리는 몇몇 청년들이 있었는데 사복으로 바꿔 입은 경찰관 아니면 특무대 대원들이었다. 이 강연회장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사복 경찰들이 목을 지키고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판이어서 강연 들으러 오던 사람도 혼비백산하여 되돌아서는 지경이었다. (주석 8)
5ㆍ20 총선은 경찰ㆍ특무대ㆍ공무원이 총동원되고 깡패들까지 날뛰는 불법 무도한 선거로 시종하였다. 현직 국회의장의 선거구에서 이럴 정도면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인규는 이번 선거에서 신익희를 떨어뜨리고 입신하고자 날뛰는 야망에 찬 인물이었다.
신익희가 나온 지역에는 누가 나왔냐 하면, 바로 1960년 3ㆍ15부정선거를 이승만 밑에서 지휘한 사람입니다. 바로 최인규가 나왔어요. 최인규는 신익희 선거운동을 봉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중간에 여론조사를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조사에서 이상하게도 다 자기를 선택하고 신익희를 선택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모의투표 비슷한 짓을 했더니, 이러면 그냥 놔둬도 괜찮지 않아? 그래서 나둬버렸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중에 신익희를 다 찍어버렸죠. (주석 9)
신익희는 광주군민들의 깨어 있는 주권행사로 당선되었지만, 전국적으로 민국당이 참패하고 자유당이 개헌선에 육박하는 당선자를 냈다. 관권부정선거의 결과였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몰락으로 치닫는 징검다리 총선이었다.
주석
8> 신창현, 앞의 책, 688~689쪽.
9> 서중석, 앞의 책,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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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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