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신페이오구라는 ‘우리말’을 왜 연구했을까. 그는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나의 조선어 연구 동기는 조선어란 원래 어떤 언어인가, 즉 조선어가 어떤 구조를 가지며 주위 언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밝히고 싶다는 생각해서 출발한 것이다."
<조선어 방언 사전>(한국문화사)
오구라는 1927년에 신라 향가(鄕歌)와 이두(吏讀)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 오구라가 발간한 <향가 및 이두의 연구>(鄕歌及び吏讀の研究)는 다카하시 도루, 쓰치타 교손, 마에마 교사쿠, 양주동 같은 일본과 한국 학자에게 큰 자극을 줬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오구라는, 1935년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 은사상(恩賜賞)을 받았다.
1933년 도쿄제국대학은 오구라를 문학부 언어학과 주임교수로 임명했다. 도쿄제대와 경성제대 교수를 겸임한 그는, 1년에 일정 기간씩 조선에 머물며 학생을 가르쳤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조선인에게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언어학자인 오구라는 이에 관해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는 '각 언어에는 저마다 고유의 국민적 내지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다'라며 일본어 상용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언어학자인 오구라가 '언어에 의한 동화'는 불가능하다고 바라본 것은 흥미롭다. 다만 그는 조선인이 일본말을 배우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했다. 조선과 타이완에서 일본어 보급이 늘어나는 것은, 우수한 문화를 지닌 언어가 열등한 문화를 지닌 민족에게 저절로 흘러드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오구라는 향가와 이두를 체계적으로 해독한, 최초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23년 아유가이 후사노신이 <서동요>, <처용가>, <풍요> 3편을 해독한 연구를 바탕으로, 신라 향가 25수 전체를 처음으로 해독했다. 천년 동안 해독하지 못한 향가의 수수께끼가, 오구라 신페이에 의해 풀린 것이다. 그는 향가 25수 주해와 함께, 향가 형식과 이두 해독 방법을 제시했다.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는 "향가 문학이 성립함으로써 국문학은 비로소 형성되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오구라 신페이는 향가가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문학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오구라의 향가 해독이, 우리 국문학 분야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오구라의 향가 연구와 관련하여, 함께 언급할 사람이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이다. '국보'를 자처한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나라 재주를 통틀어 10섬이라고 하면 6섬은 이광수가 가졌고, 1섬은 내가 갖고 있으며, 나머지 3섬은 삼천만 국민이 나눠 가졌다."
그가 인간 '국보'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있으나, 양주동이 '신동'과 '천재', '기인'으로 불린 것만은 틀림없다. 1903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양주동은, 1920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 전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 그 후 1921년 와세다대학 불문과
에 입학했다.
와세다 시절인 1923년 11월 양주동은 손진태, 이장희와 함께 한국 최초의 시 문학잡지 <금성>을 발간했다. 손진태는 훗날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을 지내고, 이장희는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의 삼촌이다. 영문과로 전공을 바꾼 양주동은, 1928년 와세다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도서관'에서 촉발되고 탄생한 양주동의 향가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