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국의 도서관 사상<조선지도서관>에 2회에 걸쳐 기고한 글과 <동아일보> 연재 기사를 통해, 강진국은 자신의 ‘도서관 사상’을 펼쳐보였다. 한국 도서관계 일부에서 ‘도서관 사상가’로 추앙하는 박봉석의 사상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에 반해, 강진국이 꿈꾼 도서관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도서관 사상가’로서 강진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다.
<조선지도서관>
강진국이 꿈꾼 '농촌문고'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강진국은 '농촌문고', 즉 도서관을 농사와 생활, 교육과 의료의 인프라로 삼자고 주장했다. 농촌문고를 도서관뿐 아니라 협동조합, 학교, 병원, 나아가 농촌공동체의 중심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동시에 그는 농촌문고 보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강진국은 조선총독부의 농촌.교육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강진국이 주장한 '도서관 중심주의'는, 이 땅에서 주창한 도서관 사상 중 가장 '혁명적'이다. 농촌문고를 통해 개벽을 꿈꿨기 때문이다. 1930년대 동아시아 도서관 담론에서 강진국은,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였을 것이다. 강진국이 꿈꾼 농촌문고는, 훗날 엄대섭의 '마을문고 운동'을 통해 이 땅에서 꽃을 피웠다.
연재 말미에 강진국은 '농촌문고에 대해 문의할 사항이 있으면,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에 있는 필자에게 연락하라'는 내용을 덧붙였다. 농촌문고에 대한 글을 연재하던 1937년 무렵, 강진국이 종로분관에서 일했음을 알 수 있다. 농촌문고 사상을 정립하고 펼치는 과정에서 강진국은, 대동콘체른을 세운 '광산왕' 이종만(李鍾萬)과 만났다. 강진국과 이종만의 인연은 해방 후 '중간파' 활동으로 이어진다.
강진국은 언제까지 도서관에 몸담았을까? 1939년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강진국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진국은 1939년 4월 4일 오후 6시, '라디오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도서관 이야기'를 방송했다. 이즈음까지 강진국이 도서관에 근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강진국이 '농촌문고'에 대해 <동아일보>에 발표한 글은 '도서관 사상가'로서 그의 면모를 되새겼지만, 조선총독부 눈 밖에 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의 글을 문제 삼았다. 이재욱의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추천사를 쓴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조선총독부도서관장은, 강진국과 그의 글을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강진국의 주장은,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의 근간을 뒤흔드는 불온한 사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가 임원으로 활동한, 조선도서관연구회 기관지 <조선지도서관>이 1938년 유야무야 폐간된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이끌던 조선도서관연구회 역시, 조선총독부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이 주도하는 조선도서관연맹으로 전환되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은 1935년부터 <문헌보국>(文獻報國)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했다. 간행물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총독부도서관과 <문헌보국>은 '국가주의'에 복무하는 도서관을 지향했다.
농촌문고에 대한 강진국의 글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가토 가즈오(加藤一夫)를 비롯한 여러 일본인 학자가 쓴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일본 도서관학자가 쓴 이 책은, 한국에서 잊힌 강진국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다. 일제에 의해 도서관을 떠난 강진국을 조명한 이가, 한국이 아닌 일본 도서관계인 것이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지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은 아닐까.
해방 전후 강진국의 행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