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사진
(주)북이십일
작가 톰 미첼은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 해안을 걷다가 움직임이 없는 검은색 물체를 발견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펭귄들이었다. 끈적이고 역겨운 기름과 타르에 질식당한 펭귄들은 검은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 해변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해상에서 기름이 유출되는 일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난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해상에서 대규모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났다. 송유관 파열이 원인이었다. 이 일로 탤버트 습지는 하루 만에 파괴되었고, 죽은 물고기와 새 떼가 바닷가로 밀려들었다.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석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석유로 돈을 번다. 그러나 인류가 석유를 소비하면서 생긴 부작용을 최전선에서 감당하는 건 동물이다. 우리에겐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준, 더없이 친절한 신사인 문명이 숨기고 있는 잔혹한 뒷모습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은 필연적으로 자연이 훼손되기 마련이라지만, 문제는 그 피해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결국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자. 반려동물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직접 동물을 마주치는 일은 드물다. 다시 말하면 동물이 없는 삶이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닭둘기'라는 오명이 붙은 비둘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동물이며, 자연에서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길고양이들은 사람들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면서도 '도둑고양이'라는 누명을 쓴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나 큰지도 모르는 북극곰이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철새가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뉴스를 볼 때 잠깐 안타까울 뿐이지 당장의 일상에서 위태로움을 겪는 사람은 없다. 현대인의 일상에 동물은 원래부터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사람, 정확히는 문명인의 시선이다. 동물은 먼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인류의 주도적인 배척 아래 우리의 눈에 벗어난 곳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사람과 동물이 꼭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구역에서 살아간다면, 적어도 서로의 구역을 망가뜨리지는 말자고 말하는 것이다.
야생동물이 사람의 주거 지역에 나타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침입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전혀 결과가 다르다. 사람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헤치는 일은 그저 개발로 정의된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인 '그곳에 어떤 동식물이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람에게 영원한 일순위인 경제적 가치에 늘 밀려난다.
살기 위해 애쓰던 펭귄 한 마리
실화를 기반으로 한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속 톰 미첼이 묘사한 펭귄의 떼죽음은 글로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참담한 심정이지만, 직접 그 장면을 봤을 때의 충격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헤아릴 수 없는 펭귄 사체더미를 둘러보며 인간의 무관심과 탐욕이 얼마나 끔찍한 참상을 만들어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다. 그러다 작가는 약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죽음뿐인 그곳에서 유일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단 하나의 생명'이 거기 있었다. 그 펭귄은 '죽기 직전의 마지막 고통의 몸부림'을 치며 살려고 애썼다.
작가는 그 펭귄을 그물로 붙잡아 아파트로 데려온다. 그리고 세제와 버터와 올리브기름을 총동원하여(당시는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을 수 없어서 작가의 지식에 의존해야 했다) 펭귄의 몸을 씻어주었다. 부리로 손가락까지 물며 반항하던 펭귄은 어느 순간 고분고분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후 작가는 자신이 세제를 써서 몸을 씻긴 탓에 펭귄의 깃털에 있던 방수 기능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말은 곧 펭귄이 방수 기능을 회복할 때까지 그것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낼 수 없음을 뜻했다. 그리하여 작가는 펭귄을 몰래 숨겨 아르헨티나로 데려왔고 자신이 일하는 학교의 숙소에서 펭귄과의 동거를 시작한다.
미리 밝히지만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정세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도시 곳곳에서 테러가 만연했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서 슈퍼에서 물건을 고르는 사이 가격이 오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펭귄에게 '후안 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매일 넉넉한 청어를 사다 준다.
이것만 보면 작가가 펭귄을 구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펭귄에게 '후안 살바도'(구조된 존)가 아니라 '후안 살바도르'(구원자 존)라는 이름이 붙은 건 최고의 결정이었다. 작가의 삶은 한 마리의 펭귄으로 인해 빛나는 추억으로 가득 찼으며, 후안을 친구로 받아들인 학교 직원들과 학생들 또한 후안으로 인해 삶에 위안을 얻었다.
사람과 동물이 친구가 되려면
작가는 원래 적당한 때에 후안을 동물원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물원으로 사전 답사를 갔다가 이내 그 마음을 접는다. 그곳의 펭귄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기력하게 삶을 이어갈 뿐이었다. '누군가 오는 소리만 났다 하면 쪼르르 달려와 쾌활하게 머리를 부비며 방문자를 반기'던 후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작가는 후안이 동물원 펭귄들보다 자신의 처지에 훨씬 더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책 속에서 후안이 사람의 말을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후안의 표정을 보고 작가가 대신 대사를 써주는 격이다. 그만큼 후안을 아끼고 좋아했기에 그랬겠지만 만약 진짜 후안이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둘은 친구가 되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내 가족, 종족을 몰살시킨 종족의 일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잔혹한 복수극을 펼칠 것이다. 그러나 후안은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으로 절망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희망으로 바꿔놓았다. 후안의 사랑스러움은 결론적으로 사람이 펭귄에게 한 짓을 더욱 잔인하게 부각시켰다.
작가와 후안이 써 내려간 아름다운 시간을 지켜보고 있으면 문득 어떤 동물이라도 후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 느낌을 최대한 오랫동안 간직할 작정이다. 그 느낌만으로도 지금보다는 더 진지하게 동물의 살길을 고민하게 될 테니까.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마젤란펭귄과 철부지 교사의 우연한 동거
톰 미첼 (지은이), 박여진 (옮긴이),
21세기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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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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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을 세제로 씻긴 남자,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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