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외식타운의 전경용인은 이제 인구 110만의 대도시가 되었다.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아직 도시의 정체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운민
그러나 우리가 용인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산자락까지 빼곡하게 아파트로 들어찬 수지구 정도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경기도 중부에서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용인은 그 넓이만큼이나 수많은 이야기가 앞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먼저 용인의 역사를 살펴보며 그 이야기의 막을 열어보도록 하자. 용인은 크게 처인구로 대표되는 동부지역과 기흥구, 수지구의 서부지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동쪽으로 갈수록 산지가 넓게 발달하지만 경안천, 탄천 등 여러 물줄기가 도시를 두루 지나가며 평야가 어느 정도 발달해 사람들이 예로부터 거주하기 좋은 곳이었다. 특히 동백동의 택지지구를 개발하면서 신석기,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용인은 다른 경기도의 도시처럼 한강유역과 멀지 않았기에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소속이 계속 바뀌곤 했다. 그만큼 멸오, 구성, 거서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던 용인은 고려 건국 이후 용구현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용인지역에는 천대받던 사람들이 살아 특수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었던 향, 소, 부곡 중 하나인 처인 부곡이 함께 있었다.
이 처인 부곡은 훗날 몽골의 침입 때 김윤후의 활약으로 처인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처인현으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따로 존재하던 용구와 처인은 조선시대에 비로소 각각 앞글자와 뒷글자를 따서 하나로 합쳐지니 지금의 용인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