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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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3ㆍ1혁명에 참여하기 전, 그러니까 국치 이후 10여 년 동안 한글신문 <기독신문>의 편집위원과 서기로서 많은 논설과 사설을 썼다. 실질적 주필의 역할을 맡아 수행하였다.
병탄과 함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강탈한 일제가 '대한'을 삭제하고 <매일신보>로 개칭하여 신문을 발행할 때 <기독신문>은 유일한 우리말(글) 신문이었다. 그리고 <신생명>, <한인기독교보>, <청년>, <별건곤> 등 총독부의 간섭이 극심한 매체에 많은 글을 썼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닌 처지에서 민족대표로 선임되어 서명한 것은 기독교 언론인으로서의 위상 때문이었다. 언론인의 신분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한 유일한 분이다.
선생이 혹독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접한 기독교정신에 근거하였다. "박동완은 기독교와 민족사의 맞물림과 엇물림의 역사 전환기에 민족운동에 헌신"(박재상ㆍ임미선,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굴곡진 시대 참담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돈독한 신앙심과 옹골찬 역사의식으로 주어진 사명을 다하였다. 재만 동포들이 만주군벌과 일제의 2중탄압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유지들과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설하여 현장을 찾아 동포들을 위로하고, 귀국하여서는 야만적인 탄압상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신간회 활동이 총독부의 탄압과 내부갈등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언론활동ㆍ신앙운동 역시 극심한 압제의 대상이 되자 선생은 1928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40이 넘은 나이에 망명을 택한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국이 갈수록 어렵게 되면서 '민족대표'의 위상을 유지하며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유혹과 압박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썼던 육당 최남선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면서 일제와 타협하기 시작하고, 1925년에는 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되어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사 왜곡에 동참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과는 동서간이었다.
하와이에서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서 목회활동과 <한인기독교보>를 발행하는 한편 교회 안에 별도의 한글학교를 세우고 우리말 교육을 통해 교포 1세와 2세의 민족의식 고취에 열정을 쏟았다. 하와이는 만주ㆍ해삼위에 이어 제3의 독립운동 전진기지가 되었다.
어디이던 '민족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은 실천적 기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