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공원에서 조망하는 난곡동 풍경.난곡동 일대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배수지공원(하늘공원) 생태다리.
이상헌
동남쪽으로 관악산이 펼쳐지고 반대방향으로 난곡동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하늘공원에서부터 호압사로 이어지를 수 있도록 능선이 끊긴 곳에는 생태다리를 조성해 놓았기에 차량의 간섭없이 호젓하게 걸어볼 수 있다.
광신고교를 지나 난향동으로 내려와 길을 건너면 관악산 생태공원으로 오르는 길에 정정공(貞靖公) 강사상(姜士尙) 묘역이 있다. 서울시 지정의 유형문화재이며 출입문을 잠궈놓았기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담장이 낮아서 안쪽을 훑어볼 수 있다. 강사상은 선조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던 인물로서 축재를 멀리하여 집 한 채도 장만하지 않고 청렴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을 위해 오욕을 뒤집어 쓴 강홍립
난곡의 원래 이름은 이리고개(狼谷)였으나 어감이 좋지 않아, 강사상의 장남인 강서(姜緖)가 자신의 호와 동네 이름을 난곡으로 바꾸고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손자인 강홍립(姜弘立)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난초를 많이 심어서' 이름지어졌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강사성이 죽고 나서 11년 후 임진왜란이 터지고, 강홍립에 이르러는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동북아는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당시 중립외교를 펼치고 있던 광해군은 조·명 연합에 따라 부차 전투에 출정한 강홍립에게 명나라를 돕는 척 하면서 후금에 투항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임진전쟁을 겪으면서 여진족의 부흥을 눈여겨 본 광해군은 강홍립을 중용하여 실리외교를 펼쳤다. 큰 희생없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강홍립은 이후 8년간 후금에서 억류생활을 하며 기밀 정보를 조선으로 보냈기에 광해군은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면서 양면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 난초골 따라 생태공원 탐방해볼까? ⓒ 이상헌
그러나 사대주의에 함몰된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쫓고 정세는 급변한다. 정권을 장악한 사대부는 여진족을 적대시하여 후금이 쳐들어오게 만들고 다급한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간다. 이때 후금과 함께 조선으로 온 강홍립이 수완을 발휘하여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화의가 이루어진다. 8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강홍립이었지만 반정 세력에 의해 배신자로 낙인 찍혀 귀양을 갈 수 밖에 없었다.
한줌도 안 되는 벼슬아치의 등쌀에 인조는 강홍립을 난곡으로 유배시켰고 귀국한지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명나라를 떠받들던 지배층은 청나라(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꿈)가 동아시아를 통일하는 정세를 살피지 못하여, 강홍립 사후 9년만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는다. 인조는 청 태종을 향해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였고 형제의 나라에서 '군신의 나라'로 굴복하고 만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세자빈, 훗날 효종이 되는 차남 봉림대군 그리고 조선 여인 50여만 명도 함께 볼모로 잡혀 청나라로 끌려간다. 우리의 불쌍한 여인네들이 모진 수모를 겪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당시의 양반들은 환향녀(還鄕女)란 멸칭을 쓰면서 손가락질 하기 바빴다.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화냥년이란 비속어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