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 모습(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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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미국과 일본은 1910년대를 거치며 갈등관계로 전환됐다. 일본은 만주를 지배하며 명실상부한 대륙국가로 정립하려는 목표 속에 본격적인 제국주의 세력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의 문호개방원칙과 충돌하며 훗날 태평양전쟁의 씨앗이 됐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의 자신감은 폭주(暴走)로 바뀌기 시작했다. 1915년 1월 일본은 영일 동맹을 명분으로 독일의 조차지(租借地, leased territory)인 중국 산둥반도의 자오저우 만을 함락했다. 일본은 중국에게 국토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21개 요구조항'을 제출했다. 굴욕적인 요구조건을 받아 들일 수 없던 중국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주베이징 대사로부터 이를 자세히 보고 받은 뒤 "우리는 중국을 방어해야 하며 일본의 요구가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미국의 문호개방 정책에 위반하는 어떠한 조약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 뒤, 이를 일본에 통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미일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미일 관계 악화가 심화되는 계기였다. 1918년 미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약 6만 명의 체코 군단 구출을 위해 일본에게 공동파병 제안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북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 7만2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일본이 시베리아 점령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에 대해 대노하며 "일본에 대한 재정적 또는 물자적 원조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일본 정부에게 엄중 항의할 것을 지시했다. 미국 측은 그후 1921년 5월, 시베리아 점령에 의한 일본의 어떠한 요구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경고문을 보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종식을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과 일본은 산둥반도를 놓고 '충돌'했다. 산둥반도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안'이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부결되자 윌슨의 반감은 더욱 커졌으며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촉발되고 5.4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팽창주의 야욕은 미국의 중국 주권옹호와 시장개방 정책과 부딪히게 됐고 두 국가는 서로를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폭주는 1931년 만주점령에 이어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중일전쟁)으로 극에 달했다. 미국은 1920년대 대공황을 겪으며 일본의 폭주를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1930년대에 접어들며 대일본 유화정책으로 일관하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바라보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관련한 중립 법안을 제정하는 등 대일본 유화정책을 이어갔다. 심지어 1937년 10월 개최된 브뤼셀 회의에서 미국은 영국·프랑스 등이 제안한 대일본 무력행사 제안을 거부하며, 사실상 일본의 침략행위를 부추기기까지 했다. 당시 미국의 대일본 유화정책은 석유와 철강 등 전략물자의 대일 공급이 독점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폭주와 이를 눈감은 듯한 미국의 태도는, 끝내 '난징대학살(1937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이라는 미증유의 전쟁 범죄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당시까지 미국은 중국 내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일본과 보조를 맞추며 중국을 공동관리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대미 불신감이 커진 원인이기도 하다.
진주만 공습 발발... 전면적 대일본 공세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