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지서에 구금된 이들이 처형된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옴팍골
박만순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국민학교 교실에서 나온 이들은 뒷결박을 당한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앞으로 가!" 경찰의 호령에 이들은 운동장 한가운데로 갔다. 운동장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안쪽으로는 폭 2미터의 해자(垓字)를 팠다. 빨치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해자 안쪽에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로 커다란 울타리를 만들었다. 제일 안쪽은 돌담을 쌓았다. 하나의 견고한 성(城)이었다.
소년 살려준다고 목숨 위협받은 경찰
주민들이 12열 종대로 세워졌다. 15세 이하 어린이들은 별도로 세워졌다. 경찰들에 의해 이리저리로 쓸려 다니는 주민들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경찰들의 눈에 살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두 명이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왔기 때문이다.
"전부 태워"라는 상급자의 지시에 불갑지서 경찰들은 민간인들을 GMC 트럭에 실었다. "이것들은 뭐야!" 고함을 친 이는 조철민(가명) 지서장이었다. "어린애들입니다" 김순호 차석의 답변이었다. "뭐야? 이 자식아. 너도 죽고 싶냐?" 허리에서 권총을 빼 김순호 차석의 머리에 갖다 댔다.
하지만 김순호 차석은 눈도 끔쩍하지 않았다. "열다섯도 안 된 애들입니다." 김 차석의 말에 조 지서장은 "열 살 이상은 전부 죽이라고 했잖아"라며 고함을 쳤다. 김 차석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조 지서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휙 몸을 돌렸다.
트럭에 태워진 이들은 1km 정도 떨어진 거리의 옴팍골로 이송됐다. 그들은 총성과 함께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고꾸라졌다. 1951년 2월 25일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옴팍골에서의 일이다.
사실 전날인 2월 24일까지만 해도 불갑지서가 불에 타 임시지서로 사용된 불갑국민학교에는 처형할 사람과 살려줄 이가 분류돼 있었다. 그런데 전날의 탈출 시도에 공기가 냉각된 것이다. 그나마 불갑지서 김순호 차석의 목숨 건 행동이 15세 이하 어린이들 목숨은 건지게 했다.
언니 따라 '골'로 간 소녀
그렇다면 불갑국민학교에 구금돼 있다가 옴팍골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용천사를 중심으로 한 불갑산 남쪽에서 국군 제20연대 2대대가 빨치산과 교전 후 주민을 총살하거나 연행한 것과 달리, 북쪽의 영광군 묘량면과 불갑면 지역 주민은 1951년 2월 20일 영광경찰서 기동대와 함평경찰서 기동대를 피해 불갑산 주변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인 2월 21일 아침부터 경찰은 전남 영광군 불갑면과 묘량면의 미수복 지역이거나 좌익 성향의 마을 주민을 영광경찰서 불갑지서와 묘량지서로 연행했다. 이들은 용천사 주변에서 군경에게 붙잡힌 주민과 같이 조사를 받았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불갑지서에 구금된 이들은 옴팍골에서, 묘량지서에 있던 이들은 시산재와 흘루개재에서 죽임을 당했다. 결국 불갑지서로 사용된 불갑국민학교에 연행돼 구금됐던 이들은 영광군 등지에서 불갑산으로 피난 온 이들과 용천사 주변에 있던 인근 주민과 피난민들로 혼재돼 있었다.
대보름작전의 와중에 불갑국민학교로 끌려온 소년 박득수(1938년생)는 운명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200여 명의 주민이 운동장에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의 일이다. 같은 마을인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의 두 살 많은 소녀가 "언니 두고 혼자 살 수는 없다"며 죽음의 대열에 합류했다. 15세 소녀의 사연을 박득수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보담 두 살 더 먹은 아가씨는 나하고 같은 줄에 앉았었거든요. 한 동네에서 상게(사니까) 알아요. 근디 이리 띠어 재껴 놨단 말이어요, 우리는. 이 짝에 살려 보낼 사람들은. 그런디 즈그 언니는 같은 줄에 앉지 안해. 어른들이 이렇게 있는 넉 줄 거기 가서 있는디, '나 혼자 살아서 뭣 한다냐' 하고는 즈그 언니 딱 보듬고. 경찰이 잡아 댕겨도 필요 없어. '나 혼자 살아서 뭣한다냐고. 같이 언니 따라가서 죽는다'고 하며 그렁게 그대로 댈고 갔어요."
광암리 소녀는 '언니 두고 혼자 살 수는 없다'며 죽음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엄마를 따라온 영유아들은 그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4세 이하 아기들이 혼자 집에 갈 수 없다는 이유(?)로 옴팍골에서 엄마와 함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의 문만섭(1935년생)의 조카 문경남(당시 3세), 문덕순(당시 1세)이 그런 경우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유해 발굴 보고서>) 옴팍골에서는 어린이와 영유아의 죽음이 예외적인 경우였다. 하지만 불갑산 산야(山野) 곳곳에서는 이런 예외적인 경우가 없었다. 여성과 아이가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이었겠지만, 이들의 죽음은 대다수가 1951년 2월 20일 오후 이루어졌다. 즉 교전 중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포로로 잡힌 민간인들 특히 여성과 아이를 처형한 것이다. 당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불갑산 곳곳에서 울렸다 한다. 영광군 삼서면 여맹위원장이었던 김묘신(가명)의 증언이다.
"그러고 엄마가 죽으면 애기도 죽을 것 아닌가요? 그래서 그 불갑산 작전에 이곳에 애기 울음 저곳에 애기 울음, 참 배고파도 울고, 참 얼마나. 거기 가 쪼깐 있는 동안 참 눈물바다였어요."
피난처가 아닌 호랑이굴이었다
빨치산들이 군경의 공격에 대비해 파놓은 전호(방공호) 앞에 세 줄로 세워진 이들의 입술은 새파랬다. 날씨가 추웠던 탓도 있지만 잠시 후면 세상과 하직할 것이라는 생각에 백지장 같은 얼굴에 퍼런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면 제일 밑으로 가 찍소리하지 않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문만섭(1935년생)은 슬쩍 맨 앞줄로 이동했다. '타타탕'하는 소리와 함께 문만섭이 넘어져 전호 맨 밑으로 깔리고 그의 등 위로 같은 마을 허홍렬(1934년생)과 박연수가 쓰러졌다.
문만섭 옆은 박연수의 딸이 있었고, 그녀의 등에는 어린 딸, 그 위에는 박연수의 아내가 있었다. 약 100미터 길이의 전호에 3명씩이 묻히게 된 것이다. 약 300명이 불갑산 전호에 묻힌 때는 1951년 2월 20일 오후였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승인지 저승인지 분간이 안 가던 문만섭은 쓰라린 고통이 밀려오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직감했다. 왼손으로 귓불을 만지니 감각이 없었다. 총격에 귓불이 날아가고, 오른팔까지 해서 총 3발을 맞았다.
자신의 등에 있는 시신을 제치고 전호에서 머리를 쳐드니 가까운 거리에서 군인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이른 저녁이었다. 순간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군 장교가 "여기 산 사람은 손들고 일어나라. 살려 주겠다"고 했다. 몇몇이 일어나자, 잠시 후 총격이 있었다.
문만섭은 '조금 전 일어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몸에서 피가 한 양동이는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그렇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무의식중에 신음을 냈다가는 '골'로 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확인 사살이 시작됐다. 목숨줄이 끊어지지 않아 신음하거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방아쇠가 당겨졌다. 문만섭 앞에 선 군인이 "야. 일어나"라고 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군인은 세 차례 반복했다. 죽은 척하고 있는 문만섭에게 군홧발이 날라왔다. "군홧발로 마빡(이마)을 정통으로 맞았지만 꾹 참았제." 그렇게 총 세 차례의 확인 사살 후에야 군인들은 물러났다.
그렇다면 소년 문만섭은 대보름작전 날 왜 불갑산에 있었을까. 장성 빨치산은 군의 토벌 소식에 불갑산으로의 입산을 결정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동 루트가 발각될 것이 두려웠던 빨치산은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주민들에게 "여기 있다가는 군인들한테 전부 죽습니다. 같이 입산합시다"라고 했다.
당시 빨치산들은 인민군이 곧 남하할 것으로 기대했고, 그때까지 주민들과 같이 행동하면 안전하겠다고 판단했다.
노인을 제외한 주민들은 빨치산을 따라 1951년 1월 29일 불갑산에 올랐다. 함평군 해보면 대각리 오두치(오두재) 민가에 장성군 삼서면·삼계면당 산하 조직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두치 민가에 삼서면 학성리 주민들의 자리는 없었다. 산 능선에 움막을 쳤다. 움막이라고 해봐야 이슬만 가릴 정도였다.
소년 문만섭을 포함한 삼서면 학성리 주민들이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 호랑이굴로 들어갔다는 걸 확인하는 데까지 불과 2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군·경·민간인의 '인간사냥'
피를 한 바가지 쏟아 정신이 어질어질한 문만섭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산에서 내려 올 때였다. 자신보다 앞서서 걷는 이가 있어 자세히 보니 자신과 같은 면인 삼서면 수해리 청년이었다.
수해리 청년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지, 나무를 지팡이 삼아 하산하고 있었다. '쩌그요'라며 아는 체를 하려는데,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수해리 청년이 쓰러졌다. 문만섭이 무슨 상황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죽창을 든 청년방위대원이 돌로 청년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었다.
문만섭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몇십 미터의 차이로 운명이 뒤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청년방위대원의 공격목표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문만섭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청년방위대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산을 내려갔다.
청년방위대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야 문만섭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수해리 청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청년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만섭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뒤따라오던 청년방위대원이 자신의 수건을 벗어 머리를 묶어 주었다.
두 청년방위대원이 '병 주고 약 준 격'이었다. 약을 준 청년방위대원 역시 비상약품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자신도 총 세 발을 맞아 문만섭이 수해리 청년을 부축할 여유(체력)는 없었다. 이후 마을로 간 문만섭이 수해리 청년이 살아왔다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국군 제11사단 20연대를 주축으로 벌인 대보름작전에는 함평경찰서와 영광경찰서 경찰들이 동원됐다. 여기에 보조 병력이자 길 안내자로서 청년방위대원이 동원됐다. 청년방위대원들의 무장은 기껏 죽창이었지만 이들의 횡포도 만만치 않았다.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청년이 그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군·경·민간인이 '인간사냥'에 나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