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현충일이 되면 국립대전현충원 앞에서는 김창룡 등 친일파의 파묘를 주장하는 시민단체들의 시위가 이어진다.
임재근
한국인들이 '친일파'를 오늘날과 같은 의미, 즉 '자기 일신과 일족만의 영달을 위해 일본 침략자들에게 부역하면서 동족을 괴롭히는 자'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한 건 을사늑약 이후, 특히 1907년 고종 양위와 군대 해산 이후였다.
'친일파'라는 단어에 토왜(토착왜구)·매국노·민족반역자·사익 지상주의 모리배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문화는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됐고 해방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았다. 일차적인 이유는 반민특위 활동의 좌절로 새로운 대일 관계 위에서 친일 개념을 재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일에 결부된 온갖 부정적 의미가 과거의 망령이 되지 못하고 현존하는 권력으로 남았으며, 일제강점기의 반민족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의식이 지배적 지위를 점했다.
글로벌 시대에 '친일'이라는 단어가 욕으로 쓰이는 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엘리트들이 과거 반민족 행위자들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리고 대중의 눈에 그런 사실이 보이는 한, 친일파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조선 이후 일제 병탄과 쿠데타, 민주화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역사는 친일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의 싸움이었다. 친일세력이 해방 후에도 헤게모니를 쥐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역사는 계속 왜곡되고 변질됐다. 친일세력은 이승만 독재 세력으로 이승만 독재 세력은 군사쿠데타 세력으로 IMF 경제 위기를 초래한 세력으로 이어진다.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는 역사는 광복을 맞은 지 77년이 된 오늘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2011년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9명의 친일인사 중 최소 76명이 현충원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11년이 지난 2022년 이 숫자는 더 늘어나면 늘었지 줄지 않았다.
이 중 60명이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을 진압한 김백일(서울현충원)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김창룡(대전현충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60명 중 박정희 정권에도 참여한 사람은 31명이다.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신상철, 여수‧순천 사건의 진압작전에 참여했고 한국국방연구원장을 지낸 송석하,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국방장관을 역임한 유재흥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를 거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