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식을 마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로 가고 있는 모습(출처: 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386세대 등을 영입해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력이 김대중 당의 컬러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3년 2월에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진보세력을 더 광범위하게 결합시켜 그해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새천년민주당과는 별개의 정당이었다.
2008년에 집권한 이명박 정권은 한나라당을 그대로 계승했다. 정권 말년인 2012년 2월 13일에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개칭됐지만, 이를 주도한 것은 이명박 정권이 아니라 박근혜 진영이었다. 새누리당 역시 민정당-민자당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3년에 출범한 박근혜 정권은 새누리당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촛불혁명으로 몰락했다.
2017년에 출범한 문재인 정권도 재임 중에 신당을 창당하지 않았다. 2015년 12월 28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개칭된 더불어민주당 당명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명박 집권 이후로는 현직 대통령이 재임 중에 신당을 창당하는 일이 없었지만, 그 이전 역대 정권들에서는 그런 일이 반복됐다. 4·19 혁명으로 집권한 직후에 구파와 신파가 별도의 국회 교섭단체를 등록한 민주당 정권하에서도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집권세력이 당명 개칭이나 외부세력 영입 또는 정당 흡수의 수준을 넘어 신당 창당을 성사시키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 수월한가를 살펴보려면 자유당 창당, 유정회 창립,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보수세력이라는 점에서는 한민당과 다르지 않았지만, 지방 토착세력과 신흥 상공인들이 주축이 됐다는 점에서는 많이 달랐다.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의 책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에서는 "한민당의 친일 보수세력과는 그 성격이 다르고, 특히 지방에서 좌익계를 타도하는 데 기여한 지방의 친일 부르주아지들이 그 핵심"이라고 평한다. 이승만이 지방세력과 신흥 기업인들이 결집한 것이 자유당 창당의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박정희의 유정회는 국민 선출이 아닌 대통령 추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국민과 당원이 아닌 박정희에게만 신경을 쓰는 집단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1973년 총선에서는 219석 중 73석을 차지해 민주공화당과 공동으로 제1당이 됐고, 1978년 총선에서는 231석 중 77석을 차지해 공화당(68석)과 신민당(61석)을 제치고 제1당이 됐다.
박정희가 유정회를 띄운 것은 정당 정치 무력화를 위해서였다. 위의 <조선일보>는 "종전과 같은 정당 중심의 국회 운영은 지양되지 않을까 여겨진다"라고 한 뒤 "장기적으로는 여야의 개념이 모호해져 거국적 총화를 통한 국력 집약만이 부각되게 한다는 전망"이라고 소개했다.
박정희가 정치 무력화를 위해 유정회를 만들었다는 점은 1978년 12월 20일자 <동아일보> 2면 하단에서도 언급됐다. "물의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당료를 당에서 물러나게 하는 대신 유정회에서 조용한 일을 하도록 하고, 당은 무색투명화된 가운데 유정회와 이원체제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게 박 정권의 의중이라고 기사는 말한다.
유정회는 정치 성향이나 출신성분에서는 기존 보수정당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비판 없이 무조건 따르는 보수세력이라는 점에서는 달랐다.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군주와 특권층의 갈등을 없애기 위해 고안된 여당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 견제 없이 독재정치를 하고자 했던 박정희의 의도가 이곳에 투영됐던 것이다.
박정희는 1965년 한일협정 강행과 1969년 3선 개헌 강행으로 국민들의 신망을 크게 잃었다. 하지만, 3선 개헌에 뒤이은 유신 선포와 공안정국으로 집권층에서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집권을 2원화하고 상호 견제시켜 자신에 대한 견제를 없애려는 시도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정회는 새로운 정치를 이끌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정회 창립 자체가 새로운 세력에 기반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새로운 집권당을 만들어내고 유지했기 때문에, 이 시기 박정희의 정치는 한층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과 신당 창당, 가능한 조건들 보면... '윤석열 신당'은 어떨까
노무현의 열린우리당도 이전의 정통 야당과 많이 달랐다. 이는 노무현 정권의 엘리트 충원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2005년 5월 <문학과 경계>에 게재된 정병기 서울대 대우교수의 논문 '참여정부 이후 정치적 파워엘리트의 교체와 전망'은 "노무현 정부의 엘리트 충원망은 대구사회연구소, 미래전략연구원, 한국정치연구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등과 같이 권력의 변방에 위치했던 그룹들로 짜였다"라고 설명한다.
이승만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충원한 결과로, 박정희는 공포정치로 국민과 야당뿐 아니라 집권당까지 겁준 결과로, 노무현은 진보적인 세력을 한층 충원한 결과로 종전 집권당과 다른 신당 창당을 성사시켰다. 당명 개칭, 외부인사 영입, 정당 흡수를 넘어서는 신당 창당은 이런 조건들이 갖춰졌을 때 한국사에 쉽게 등장하곤 했다.
윤석열 정권은 국민의힘을 배경으로 집권했다. 검찰 출신들이 가담하기는 했지만, 대선을 이끈 것은 기존의 보수정당이다. 검찰 출신들이 대선 뒤에 대통령실과 행정부에 배치되기는 했어도, 이들이 국민의힘을 '장악'했다고 볼 수는 없다.
윤석열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을 정치세력은 아직 뚜렷이 부상하지 않았다. 윤 정권이 새로운 주역들을 정치권 외부에서 충원할 힘이 있다는 것도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만약 새로운 세력이 충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당을 창당하고 이를 유지하고자 하게 된다면, 유신체재 때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지 않으리라 단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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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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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이슈인 '윤석열 신당 창당설'... 과거 사례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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