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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미 국빈 방문, "역사적" 자찬하지만...실상은 이렇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역대 방문 상황 살펴보니... 자국 이익에 늘 우선인 미국의 패턴

등록 2023.03.10 11:26수정 2023.03.1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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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5월 21일 방한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건배하는 모습.
지난해 5월 21일 방한 당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건배하는 모습. 대통령실 제공
 
한미 양국이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동시에 발표하면서 이것이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한미동맹 70주년을 언급하는 한미 양측의 뉘앙스는 다소 달라 보인다. 8일 브리핑에서 대통령실은 "70년간 축적된 한미동맹의 성과를 축하하고, 동맹의 미래발전 방향에 관해 심도 있는 논의를 가질 것으로 예상됩니다"라며 한미관계에 방점을 찍었다.

미국 현지시각 7일에 나온 백악관 브리핑 자료엔 "다가오는 방문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한미동맹은 양국은 물론 인도-태평양 지역과 전 세계의 평화, 안정, 번영을 증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통령들은 정치·경제·안보 및 인적 유대를 심화하고 확대하기 위한 우리의 공통된 의지를 토의하게 될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백악관은 한미 양국의 안보뿐 아니라 중국 견제 목적의 인도-태평양전략을 위해서도 한미동맹이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게다가 "전 세계(around the world)"까지 언급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한국의 역할 확대를 주문할 여지도 남겨둔 것으로 풀이된다. 

또 정치·안보뿐 아니라 경제적 유대에도 주의를 환기시켰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나 반도체 지원법 등을 매개로 점점 강화되는 미국의 경제·통상 압력을 떠올려보게 된다. 말하자면, 미국이 '단단한 채비'를 갖춰놓고 윤 대통령을 맞는 것이라 예측해 볼 수 있다.

백악관 '국빈 만찬'의 의미 

국내 언론에 보도된 2014년 2월 11일자 미국 CBS방송에 따르면, 백악관에서 국빈 만찬을 연 횟수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는 8년간 35회, 조지 부시 때는 4년간 21회, 빌 클린턴 때는 8년간 19회, 조지 부시(주니어) 때는 4년간 6회였다. 미국이 동맹을 맺었거나 관련을 맺은 국가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국빈 만찬 횟수는 적은 편이다. 미국이 국빈으로 초청하고 그 기회에 국빈 만찬을 베푸는 것이 상대국에 대한 상당한 배려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미국의 '상당한 배려'가 곧 국빈 초청 국가의 '상당한 국익'을 의미할까?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시절에도 한국 오피니언 리더들은 '국빈방문이 마냥 실속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양국 간의 현안은 공식방문이나 실무방문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국빈 방문(1991.7.1.)을 앞둔 시점에 나온 <동아일보> 기사 '국빈 방문의 허와 실'(1991.6.4.)은 "국빈방문은 공식업무 협의 방문과 내용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고, 단지 백악관 뜰에서의 공식 환영 행사와 연도의 양국 국기게양 그리고 저녁 만찬 등 방문의 의식과 모양새를 달리할 뿐"이라며 "백악관은 그 나름의 잣대로 초청 상대에게 이 겉치레의 제공 여부를 저울질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빈방문을 통해 한국이 얻을 이익이 크지 않다는 인식을 내비쳤던 것이다. 
 
 1991년 6월 4일자 <동아일보> 보도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91년 6월 4일자 <동아일보> 보도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동아일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위 기사는 당시까지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휴전 1년을 앞둔 1954년 7월 21일 시작된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북진통일을 원하는 그를 달래고 억눌러 휴전을 성사시킨 미국이 그를 위로하는 한편, 한국을 친미 반공연대에 계속 묶어둘 필요성에서 이뤄졌다.

이현표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은 2012년 5월 24일자 <미래한국>에 실린 '대한민국 최초의 국빈 방미에서 생긴 일'이란 기고문에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6.25전쟁 휴전을 성립시켰지만 이승만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그를 회유하고 싶었다"라며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65년 5월 17일 시작된 박정희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2023년 지금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뤄졌다.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 협정(통칭 한일협정)이 가조인(2.20)돼 정식 조인(6.22)을 앞둔 시점이었다. 한미일 군사동맹이 어렵지 않으리라는 낙관론도 지배할 때였다. 또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비화된 베트남전쟁에 맞서 미국이 친미진영 단결과 한국군 파병을 요구하던 시기였다.

당시 미국은 한국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일협정을 강행하는 박정희를 응원했다. 그해 5월의 국빈방문은 그런 박정희를 한층 독려하고 한미일 군사동맹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한국의 베트남전쟁 지원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반영하는 일이었다.

그해 5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현지에서 박정희를 수행한 조용중 특파원은 본사 데스크와의 전화 통화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를 국빈으로 초청해놓고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판단을 전했다. 조 특파원은 "존슨 특유의 스타일을 십분 발휘했다"라며 "존슨은 자기 플랜대로 박 대통령을 몰고갔으며, 박 대통령이 다른 데 관심을 팔 수 없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자기 회담 도중 박 대통령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와 기자들에게 공개한 것이라든지... 박 대통령이 워싱턴에 체재하는 동안 그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한국대사관 시찰을 취소한 것과 케네디묘에 헌화하고 돌아오는 길에 링컨기념관에 잠깐 들른 것밖에는 모든 것이 '스케줄'대로였다."

국빈 방문에 황송해하거나 부담을 느끼는 한국 대통령을 소위 정신없게 만들면서 자국의 국익을 뽑아내는 미국의 패턴은 이후에도 나타났다. 노태우 대통령 때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전개되는 미국 중심의 탈냉전 질서에 한국을 계속 묶어둘 필요성과 더불어 한소수교(1990.9.30) 등을 추진하는 노태우 정부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에서 1991년 7월 1일 국빈방문이 행해졌다.

그해 1월 25일에는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도 체결됐다. 한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하던 미국이 태도를 바꿔 손을 내밀던 시절이었다. <노태우 회고록> 하권에도 나타나듯이 1990년 2월 15일 노태우를 방문한 딕 체니 국방장관은 북한의 위협을 새삼 거론하며 한국의 방위비 분담을 주문했다. 미국이 줄 것보다 얻을 게 많은 상황에서 국빈방문이 이뤄졌던 것이다.

역대 대통령의 국빈방문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 

제1차 북핵위기(1993.3.12)가 발생하고 이를 봉합하는 제네바 합의(1994.10.21)가 체결된 뒤인 1995년 7월 25일 시작된 김영삼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핵위기로 어수선한 한국을 한미동맹에 공고히 묶어둘 필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달 28일자 <매일경제>는 김영삼과 클린턴이 한미안보협의회의(SCM)와 별도로 대북공동전략고위협의체제 구축에 합의했다고 전했다.

IMF 외환위기 속에 이뤄진 1998년 6월 8일 김대중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외환위기 때문에 휘청이며 무방비 사태가 된 한국 경제에 진출하려는 미국 경제계의 욕구가 팽배해진 상황에서 이뤄졌다. 2011년 10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의 국빈방문은 미국의 재협상 요구에 따른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 타결되고 이것이 발효(2012.3.15)되기 얼마 전에 성사됐다.

역대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국빈 방문 초청은 한국을 달래거나 부탁할 일이 있을 때 성사됐다. 대통령실은 이런 방문이 여섯 번밖에 없었다며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이 "역사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지만, 이제까지의 국빈 방문이 증명한 것은 한국의 '역사적인 양보'뿐이었다.

남의 집을 방문하는 손님은 어느 정도는 심리적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으므로, 주인은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주인이 과도한 영접을 하면 손님이 오히려 위축돼 할 말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1991년 당시의 노태우 정부는 국빈방문이 아닌 실무방문을 원했다. 국빈방문-공식방문 다음의 실무방문을 희망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국빈방문 '팡파레'를 울리고 거창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1991년 6월 4일자 <한겨레>의 보도 내용을 보자. 

"정부는 애초 이번 방미를 실무방문으로 추진했으나 미국 쪽에서 국빈 방문을 제의했는데, 청와대는 이것이 '국제사회에서 증대된 한국의 역할을 평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미국이 생각지도 않은 국빈방문의 예우를 갖추려는 것은 무언가 받아내려는 것이 큼을 뜻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하고 있다." 

이제껏 여섯 차례 국빈방문에서 되풀이된 패턴이 일곱 번째 와서 갑자기 바뀔까? 그렇게 전망할 합리적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대통령실은 '역사적인 전기'에 취할 게 아니라, 바이든 대통령이 환대를 베풀면서 그 와중에 한국에 무엇을 제안하고 무엇을 취하려 하는지 유의해야 한다. 외교의 장은 개인 친분 과시의 장이 아니다.
#미국 국빈방문 #윤석열 국빈방문 #한미정상회담 #한미동맹 #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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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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