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위에서부터 3줄과 맨 아래가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이다. 맨 아래 줄 오른쪽으로 3기를 안정할 수 있는 공간만 남아 있다.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사이 5줄은 독립유공자 1-1묘역이다.
임재근
대전현충원에는 국가사회공헌자묘역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상훈법 규정에 의해 국민훈장, 수교훈장, 산업훈장, 새마을훈장, 문화훈장, 체육훈장, 과학기술훈장 등 훈장 받은 사람으로 국위를 선양하거나 국민적 추앙이 되는 인물 중 안장대상심의위원회 안장결정을 받은 이들이 안장됩니다. 훈장을 받지 않았더라도 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해 결정하면 안장될 수 있습니다.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는 문교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황산덕 장관이 1989년 10월 23일에 안장된 것을 시작으로 2023년 3월 17일에 안장된 김용철 대법원장까지 51명이 있습니다. 앞으로 3기 정도 안장하면 사회공헌자묘역도 만장에 이를 예정입니다.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제2차 인혁당 사건)의 '사법살인'을 주도한 인물들이 묻혀 있어 국가사회공헌자묘역의 위상에 논란을 끼치고 있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서도원(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송상진(양봉업), 우홍선(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하재완(건축업), 김용원(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이수병(삼락일어학원 강사), 여정남(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이 국가보안법·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에 대법원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해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습니다.
그런데 선고 바로 다음날인 4월 9일 새벽에 이들 8명의 사형을 집행해 버렸죠. 사형집행은 서울구치소에서 9일 오전 4시 55분 서도원부터 시작해 오전 8시 50분 도예종을 마지막으로 끝났습니다.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Dark day for the history of jurisdictions)이라고 규정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며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MBC)이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도 이 사건을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도 꼽기도 했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대법원 재판장과 판사,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이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함께 안장돼 있습니다. 대법원 재판부는 대법원장과 판사 12명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됐는데, 재판장을 맡았던 민복기 대법원장과 12명 판사 중 한 명인 주재황 대법관이 국가사회공헌자묘역 18번과 27번에 각각 묻혀 있습니다.
또한 당시 법무부장관 황산덕은 1번에,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9번에 안장돼 있습니다.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수사 중간발표를 통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성"됐다면서, 민청학련 배후에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인혁당 관계자들이 지목됨으로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시작된 것입니다.
황산덕 법무부장관은 인혁당 재건위가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주장을 직접 발표했고, 인혁당 재건위 연루자들에 대해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도록 방치했습니다. 사형도 황산덕 법무부장관의 서명을 거쳐 집행됐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12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중앙정보부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역시 2005년 12월 7일 인혁당 및 민청학련 두 사건 모두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공안사건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방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황산덕 법무부장관은 1989년 10월 23일에,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2001년 9월 12일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민복기 대법원장과 주재황 대법관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인의 무죄 판결이 난 이후인 2007년 7월 16일과 2010년 10월 14일에 각각 안장됐습니다. 인혁당 사건의 조작과 불법성이 확인됐지만,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국가사회공헌자가 돼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입니다.
이들에게 '사법살인'을 당한 이들은 칠곡군 현대묘역을 비롯해 고향 선산 등에 묻혔습니다. 그러다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민주화운동 관련자 중 사망인정자로 인정돼 이중 하재완은 2014년 11월 2일에, 서도원, 이수병, 김용원의 묘는 2018년 10월 18일에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으로 이장했습니다. 도예종, 송상진, 여정남은 경북 칠곡 현대공원묘지에, 우홍선은 경기도 파주 금촌 낙원공원묘지에 아직 안장돼 있습니다.
한편,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는 제헌 의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대표 발의하는 데 앞장섰던 김인식 의원이 20호에 안장돼 있습니다. 2008년 2월 25일 95세의 나이로 별세해 제헌의회 의원 중 가장 늦게 사망한 김인식 의원은 '마지막 제헌의원'이라 불렸습니다. 김인식 의원의 묘비 뒷면 아래 공적사항에는 '1948 국가보안법 대표발의'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처럼 피해자들을 양산해낸 국가보안법은 제헌국회에서 제정하려 했을 당시 국회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광범위하게 다수의 정치사상범을 만들어 낼 것이며, 처벌이 필요하다면 일반 형법으로도 충분할 거라는 이유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탄압할 때 활용했던 치안유지법과 같은 성격이라고 바라봤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국회는 그 즈음 발생한 여순사건을 핑계로 들며 혼란극복을 위해 비상적·한시적 조치를 전제로 제정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1948년 12월 1일자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수십 년 동안 무고한 희생을 만들어 내며 정권 유지에 악용돼 왔고, 아직까지도 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