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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신문' 발행하며 일제와 싸워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 6] 이러한 국내 발행의 독립신문도 오래는 계속되지 못했다

등록 2024.03.05 08:08수정 2024.03.0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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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지조선>(1911)에 수록된 남산총독관저의 모습. 사진 왼쪽에 보이는 나무는 은행나무로 오른쪽의 느티나무와 함께 지금도 그대로 남아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서2-7 및 서2-6)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이 당시의 통감관저터임을 알려주는 중요자료이다.-책속 설명 간추림
<일본지조선>(1911)에 수록된 남산총독관저의 모습. 사진 왼쪽에 보이는 나무는 은행나무로 오른쪽의 느티나무와 함께 지금도 그대로 남아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서2-7 및 서2-6)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이 당시의 통감관저터임을 알려주는 중요자료이다.-책속 설명 간추림이돈수(한국해연구소장)
 
나라를 빼앗기고 9년 동안 온갖 탄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한민족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포착하면서 대대적인 국권회복 투쟁에 나섰다. 비록 망국의 군주이지만 고종황제가 일본인에 독살되었다는 설까지 유포되면서 민중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을 당겼다. 다시 이희승의 회고를 들어본다. 

지금의 시경 앞쯤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일본인 순사에게 붙잡혔다. 그가 여학생 한 명을 왼손으로 붙잡고 있는 터여서 나는 본능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지금도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때 내가 도망치는 일에만 급급해 그 여학생을 구할 생각을 못한 점이다.   
 
군중들은 한국은행 앞에서 다시 집결, 왜성대에 자리잡은 총독부로 몰려가기 위해 진고개 입구 쪽으로 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군대는 이곳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고 발악적으로 총검을 휘둘러댔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군중은 끝내 흩어졌다. 
 
이날 밤부터 만세는 동네로 번져 들어가 어둠을 틈타 끊임없는 만세 물결이 일었고 이에 따라 사상자가 속출했다. 군경만으로는 역부족이던지 그들은 일본인 깡패들까지 동원했다. 몽둥이에다 큰 못을 총총히 박은 흉기를 휘둘러대기도 했다. 회사 동료 전창근 군도 흉기 에 맞아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 (주석 2)

맨주먹의 피압박 민중이 중무장한 일제 군경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33인 민족대표들은 3대 행동지침의 하나로 비폭력을 내세웠다. 실제 무장을 할래도 방법이 없었다. 통감부가 1907년 7월 의병활동을 막기 위해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여 산짐승이 나타나도 퇴치할 총 한 자루 남기지 않고 빼앗아 갔다. 
 
이희승과 동지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독립항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내외의 정보를 민중에게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 '지하신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중앙 후배 유홍·임봉순·노기정 등과 함께였다.

차츰 시위행위로만 목적이 달성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다른 방도를 모색했다. 상하이·만주 등지에서 밀송뇌어 오는 독립신문 등을 복사하여 배포하기로 했다. 현 상업은행 맞은편 호리이 상점에서 등사판을 샀다. 고약한 일본인 상점주인이 물건은 물건대로 팔고, 경찰에 밀고해서 모두가 잡혀갔다. 나는 다행히 그 화난을 피하여 경성지음회사 숙직실에 있는 등사판을 인력거의 포장에 숨겨 종묘 근처의 술래골 어느 집에 은닉해 놓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만주에서 발행되는 <압강일보>라는 일어신문을 정기적으로 우편 배달받았다. 일어신문이라 하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잘 전달되었다. 이 신문을 화롯불에 쪼이면 화학약품으로 쓴 글자가 자색으로 나타난다. 뉴우스를 이렇게 입수해서 프린트 해 내면 나는 주로 다동·당주동·서린동 방면의 배달을 책임졌다. 
 
작업장소도 여러 번 옮겼다. 결국은 가장 안전지대를 찾았는데 다른 곳이 아니라 유홍의 대고모집이었다. 유홍의 대고모부가 바로 이병무(李秉武)였는데 그의 집이 현재의 통의동 근처 큰 한옥이었다. 이병무는 바로 한말에 군부대신을 지낸 사람으로서 육적 중의 하나다. 그는 이또오의 사주를 받아 고종황제께 칼을 들이대고 선위를 강요한 인물이다. 일경이 아무리 민첩하다고 하나 이병무 집에서 모의가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이러한 국내 발행의 독립신문도 오래는 계속되지 못했다. 인물난·재정난으로 얼마 안가서 스스로 와해되고 말았다. (주석 3)

주석
2> 앞의 책, 70쪽.
3> 이희승, <자전적 교우기>, <한 개의 돌이로다>, 29~3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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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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