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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진격, 이승만과 똑 닮았던 경찰의 도망

일부러 울리지 않은 사이렌... '전남 영광 대학살' 사연

등록 2024.07.27 19:30수정 2024.07.2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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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면이 함락됐답니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경찰이 서장 대리에게 보고했다.

"음..."
"긴급대책이 필요합니다."


영광경찰서장 대리 이O동은 간부회의를 열었다. 1950년 7월 20일 북한군 6사단이 전주를 점령한 이래 정읍과 고창을 거쳐 영광의 대마면까지 와닿은 시점이다. 1950년 7월 23일 새벽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들을 내보시오"라는 서장 대리의 말에 모든 간부들은 침통한 얼굴로 탁자만 바라봤다. 누군들 특별한 의견이 있을 리 없다. 빨리 후퇴하는 것 말고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사실 회의라기보다는 참석한 간부들이 서장 대리의 후퇴 명령만을 목 빼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천근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서장 대리의 입에서 "빨리 후퇴 준비를 하시오"라는 말이 떨어졌다.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참석자들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일시에 떨어질 때쯤이었다.

"서장님 사이렌을 울릴까요?"


순간 시베리아 고기압이 형성되면서 서장실을 꽁꽁 얼려버렸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옥죄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사이렌을 울리면 좌익들이 한꺼번에 준동할 겁니다. 사이렌을 울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려는 순간 여러 개의 따가운 눈초리가 그를 향했다. 입을 열려던 그의 입술이 얼어붙었다. 서장 대리와 어떤 간부도 특별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후퇴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찰 불신
 
a  2022년 2월 22일 서울 종로구 경찰박물관에서 관계자가 경찰이 1950년대 사용하던 순찰용 사이드카와 백차(지프차)를 살펴보고 있다.

2022년 2월 22일 서울 종로구 경찰박물관에서 관계자가 경찰이 1950년대 사용하던 순찰용 사이드카와 백차(지프차)를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사방이 캄캄한 새벽 미명, 영광경찰서 마당에는 시동을 켜놓은 트럭이 있었다. 서장 대리가 조수석에 타자 트럭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광경찰서장 대리와 경찰 간부 몇 명이 새벽 6시 쓰리쿼터 1대에 쌀과 수류탄, 경기관총, 현금 등을 싣고 영광을 빠져나가 함평, 영산포, 영암을 거쳐 마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영광경찰서 경찰들은 사이렌을 울리지 않고 1950년 7월 23일 새벽 후퇴를 했다.

이틀 전 영광군 국회의원 정헌조는 어딘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인민군들이 영광 쪽으로 가고 있어요. 빨리 피난 가시오." 정헌조는 "전쟁이 나면 사이렌을 울릴 테니 그것을 신호로 모두 피난 가시오"라던 영광경찰서 경찰의 말이 생각났다.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는데, 굳이 피난 짐을 싸야 하나?'라는 생각이 맴돌았다.

하지만 정헌조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영광 경찰과 더 나아가 대한민국 경찰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사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일 전 영광군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 처형이 그것이다. 영광경찰서에서는 상부 기관의 명령을 받아 1950년 초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과거 좌익 전력자들이 자수해 대한민국에 충성서약을 하면 빨갱이로부터 보호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약속에 따라 영광군 내 젊은이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정헌조의 본가가 있는 영광군 군남면에서도 30여 명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정작 전쟁이 터지자 영광경찰서에서는 면별로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영광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그런 후에 1950년 7월 10~11일 사이에 영광면 깃봉재와 고들재, 단주리 사자등, 법성면 법성리, 군남면 검덕산 등지에서 보도연맹원을 학살했다.

그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7월 11일 이후로 영광군에서의 보도연맹원 학살이 멈추었지만 당시를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생각하며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경찰을 불신하게 된 정헌조가 피난길에 오른 것은 1950년 7월 21일이었다.

일부러 울리지 않은 사이렌

6.25 전쟁 전에 '만약 전쟁이 나면 사이렌을 신호로 피난을 가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순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영광면(현재의 영광읍)에 살고 있던 내로라하는 우익인사들이었다. 이들과 영광북국민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청년방위대 소속 대한청년단 단원 약 300명은 제대로 철수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반동' '우익인사'로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인민공화국 시절 진행된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됐다.

인민군은 7월 23일 영광에 들어오자마자 치안대를 조직했고, 치안대는 청년방위대 소속 호국군 대위인 조영욱(26세, 국민회 지회장 조두현의 장남)과 경찰관 5명을 체포하여 당일 오전 11시께 북국민학교 동쪽 산중에서 총살했다.

또 25일에는 오후 1시께 영광면 교촌리 소재 향교에서 인민재판을 실시해 영광중학교 학련위원장 박동을(21세)과 그의 여동생인 영광여중 학련위원장 박동삼(19세)을 향교 뒤쪽 밭에서 처형하였다(박찬승, <혼돈의 지역사회>, 2023).

영광 경찰들이 자신들의 안전한(?) 후퇴로 확보를 위해 일부러 사이렌을 울리지 않아 발생한 황당한 사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영광경찰서장 대리와 주요 간부들의 윤리의식이 이렇게 형편없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기 약 한 달 전의 서울 상황을 생각하면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다.

인민군은 6월 25일 3.8선을 넘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난 지 이틀 만인 1950년 6월 27일 새벽 2시 대전행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자신은 전쟁이 나자마자 안전한 후방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이승만이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새벽 3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열렸고 만장일치로 수도 사수를 결의했다.

새벽 5시 육군본부의 긴급 참모회의에서는 '정부나 국회는 후퇴해도 국군만은 최후까지 서울을 사수한다'고 결의했다. 오전 8시, 인민군은 의정부를 지나 창동까지 진입했지만, 정부에서는 이 사실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같은 날 오후 10시 중앙방송(KBS)에서 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중략) 국민들은 당분간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므로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민족의 증언1>, 중앙일보사).

이 방송은 대전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전화한 것을 녹음한 것이었지만, 서울시민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이 방송만을 굳게 믿은 이들은 시민뿐만 아니라 국회의원과 우익인사도 상당수 포함됐다.

그리고 4시간여 후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가 폭파됐다. 인민군이 한강 인도교에 도착하기 6시간 전이었다. 당시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피난민(최소 500명)이 사망했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 가지 못한 서울시민들은 그대로 인민군에 노출됐다.

천석꾼 집안의 비극
 
a 월평리 학살지도 영광군 영광면 월평리 주민 학살지도

월평리 학살지도 영광군 영광면 월평리 주민 학살지도 ⓒ 네이버지도

 
천석꾼 집안 곳곳은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모든 사물이 잠든 시각 불청객의 발걸음은 거칠 게 없었다. 불청객들은 사랑방 문을 벌컥 열며 김수영(당시 39세)을 뒷결박했다.

그는 영광면에 소문난 유력자였다. 그는 천석꾼의 손자로 소문이 났고, 대한청년단 영광군단 간부를 맡았기 때문이다. 특별자위대는 김수영이 인민공화국 통치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이날 새벽에 그를 전격 체포했다.

그런데 문제는 영광군 우익의 거두인 그만이 체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수영의 어머니 강자순(1882년생)과 둘째 부인 이대아(1910년생), 딸 김희자(1950년생)가 같이 연행된 것이다. 특히 딸 김희자는 생후 7개월 된 아기였다.

이들은 마을 주민 약 50명과 함께 영광군 영광면 월평리에서 단주리로 넘어가는 재너머 깔끄막 골짜기로 끌려갔다. 특별자위대원들은 월평리 주민 50여 명을 향해 죽창을 내지르고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김수영과 그의 가족들도 즉사를 했고, 이 와중에 생후 7개월 된 아기도 엄마와 함께 하늘나라로 갔다. 1950년 9월 14일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영광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3), 2023).

인민군이 점령했던 시절과 그들이 후퇴하기 직전, 그리고 대한민국 군경이 영광읍을 완전히 수복할 때까지인 1950년 10월 30일까지 지방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및 가족들에 대한 학살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월평리의 비극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월평리에 살던 안순덕은 남편 김아무개가 면사무소에 근무했고, 그의 아들 김수곤(당시 17세)이 영광고등학교에 다니며 학도호국단 간부를 했다는 이유로 영광국민학교에 소집 당했다. 완장 찬 이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소위 우익 가족들을 영광국민학교에 소집했을 때다.

김수곤을 포함한 다수의 주민들이 줄로 손이 묶인 채 영광면 연성리에 있는 물무산을 넘어 끌려갔다. 그들은 완장 찬 청년자위대에 의해 죽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1950년 10월 8일이었다.

안순덕은 아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10월 10일 청년자위대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 뒤 안순덕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백학리에서 가족들이 각목과 죽창으로 살해된 안순덕의 시신을 발견했다.

'영광 대학살'

도대체 6.25 당시에 전남 영광에서는 어느 정도의 민간인이 학살됐을까? 1952년 대한민국 공보처의 조사 결과를 정리한 <6.25사변 피살자명부>에 의하면, 1950년 한국전쟁기에 영광에서는 2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전쟁기 남한 전역에서 희생된 것으로 조사된 5만9964명 가운데 전남지역의 희생자는 4만3511명으로 72.6%에 이르며, 그 가운데 영광군의 희생자는 2만1225명으로 48.8%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는 전국 희생자의 35.4%에 해당한다.

이 수치에는 보도연맹 희생자를 포함한 군경에 의한 피해자는 계산되지 않은 수치다. 그렇기에 군경에 의한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6.25 당시에 영광군에서 희생된 민간인이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2만5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영광군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영광면과 백수면, 염산면이다. 그렇다면 영광면이 가장 큰 피해를 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영광면이 당시 영광군의 군청소재지로 관공서와 우익단체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광군의 유력자들이 영광면에 거주했음은 당연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
 
a  증언자 김옥환씨.

증언자 김옥환씨. ⓒ 박만순

 
월평리 김수영의 아들 김옥환(1941년생)은 전쟁의 슬픔을 전쟁이 발발한 지 74년이 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가 끌려가면서 처자식이 걱정되어 되돌아봤을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끌려가고 어머니는 어린 삼남매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시집 <아직도 희망은 있다>에서 "국가가 나라를 지켜주지 못한 탓으로 우리 집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국가는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라며 국가의 사죄와 배·보상을 말했다.

지방 좌익에 의한 죽임도 결국 국가가 책임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사이렌 #영광경찰서 #인민재판 #영광대학살 #천석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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