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헌 임병찬 선생 최익현과 더불어 의병봉기하여 대마도까지 같이 유배되었다. 출옥 후 고종 밀칙으로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으로 전국의 항일 독립운동조직을 만들고 강령과 방침을 세워 거사 이틀전 조직원이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가 드러나 무산됐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1916년 5월 거문도에서 순국했다.
임병찬 선생 고손 임백 대표 제공(세종경제신문
일제는 면암에게 징역 3년과 대마도 감금을 선고했다. 선고 이유서이다.
최모는 유생에 대해 세력과 명예를 지닌 것을 자부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통감부와 사령부를 핍박하며, 홍주 폭도 민종식과 더불어 일맥상통이 되어 실제로 목적한 바 있으니 마땅히 엄벌에 처할 것이나 정상이 가긍하여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주석 3)
임병찬에게는 징역 2년, 고석진·최제학·김기술·문달환·임현주·조은식·조영선·나기덕·이용길·유해용 등 의병에게도 징역 4개월 또는 곤장 1백 대를 각각 선고했다.
면암과 임병찬에게 대마도 유배형을 내린 것은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침이었다.
"광주 부근에서 소요를 일으킨 폭도의 거괴 최익현을 감금 3년, 참모장인 임병찬은 2년으로 처분하였음. 이 두 사람을 대마도로 송치하고자 한 것은 통감 동의였음. 전회(홍주의병 유폐와 같이 조치할 것임.) 최는 대학자. 임은 전 낙안군수였음." (주석 4)
일제는 면암이 유림은 물론 일반 민중들로부터 크게 신망을 받고 있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음으로 하여, 아예 조선 땅에서 멀리 격리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지체 없이 형을 집행하였다.
일제의 대마도 유폐 준비가 마무리되자, 면암과 임병찬은 8월 28일(음 7. 9) 대마도로 끌려가, 먼저 와 있던 홍주 9의사와 적국 유폐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면암은 헌병들의 감시 하에 8월 27일 오전에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오후 6시경 부산 초량에 도착하였다.
면암의 세 아들인 영조(永祚)·영학(永學)·영설(永卨)과 임병찬의 아들 응철(應喆), 임병찬의 아우 병대(炳大)를 비롯하여 최만식(오위장)·최우서·이승규·최제태·최제학 등이 부산까지 면암을 동행하였다.
곧이어 면암은 초량 도착 직후인 당일 저녁 배에 올라 야간 항해를 한 끝에 8월 28일 아침에 대마도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하였으며, 홍주 9의사가 감금되어 있던 시마오 소우스케의 사가인 잠상실에서 이들과 함께 유폐생활에 들어갔다. (주석 5)
주석
1> <독립운동사 자료집>2, 73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1.
2> 김의환, 앞의 책, 97쪽.
3> 박민영, 앞의 책, 185쪽.
4> <한국주차군 참모장이 육군차관에게 보낸 전보>, 앞의 책, 191쪽, 재인용.
5> 박민영, 앞의 책,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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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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