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압송되는 면암 최익현 선생.
눈빛출판사
면암과 임병찬 등 13인은 구류되었다. 전주 진위영에 구류된 것이다. 촉진위대원과 왜병 8명이 엄중히 감호하였다.
안면 있는 진위대 병사가 눈짓으로 면암의 제자에게 도망치라고 권하였으나 이들은, "구태여 싫다한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가겠는가?" 하면서 거절하였다.
이때 고을 아전 임창섭과 백장 김경철이 포위망을 헤치고 들어와 의병이 되기를 자원하여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으나 축출당하고, 또 늙은 기생 하엽이 밖에서 인삼탕 두 사발과 소주 열 두 잔을 가지고 왔다가 문지기에게 거절당하자 한탄하여 말하길, "이것을 올리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하므로 문지기가 감탄하여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인심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문지기는 이후 임병찬의 아들 응칠(鷹七)만이 음식을 장만해 오도록 허용하고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면암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연도에서 끌려가는 의병장을 지켜보았다.
태인에서 기병한 최익현·임병찬 등의 의병진은 이와 같이 해산되고 주동자 13명이 체포되어 끝났지만, 그들의 의거 사실만으로도 전국 유생과 민중을 격동시키어 그후 각지에서 계속하여 항쟁하는 한 계기를 만들었다. (주석 1)
서울로 압송된 면암이 6월 27일 숭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왜병 헌병대장 소산삼기(小山三己) 왜병 100여 명을 이끌고 나와 일본군 사령부로 구치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황명(皇命)을 받들어 포박되어 왔거늘 저 왜놈들은 무엇하는 놈들이냐? 내가 죄를 지었으면 대한의 감옥에 갇힐 것이니 대한의 최익현이 왜놈의 사령부를 알 까닭이 있느냐?"하고 호통을 다시 치셨다.
그러나 왜놈 헌병들은 불한당같이 수십 명이 달려들어 선생을 인력거에 태운 다음 저들 사령부로 직행하였다. 선생께서는 다시 이곳이 군부(軍部)냐 법부(法部)냐고 꾸짖으셨으나, 저들은 대답도 없이 선생을 붙들어 올려 저들 사령부 북감방(北監방)에 그대로 구치시키었다.
이 북감방은 바로 을사년(1905년) 봄에도 선생께서, 선생의 배일사상을 겁내는 사령관 장곡천(長谷川)에게 피체되어 수일 동안 수감되신 바 있던 한많은 그 감방이었다. 이에 다시 그 감방에 들어서시게 되자 선생께서도 쓴웃음을 지으시면서 쓸쓸하게 다음과 같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셨다.
"늙어 가면서 제비와도 같이 옛집을 다시 찾게 되는구나." (주석 2)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노산 이은상의 시 <면암 선생>의 후반 부문이다.
가묘(家廟)에 하직하고 호남으로 내려가며
맨손으로 나선 몸이 이루기야 바랐으랴
충의로 솟는 의기라 억누를 길 없었네
절사(節士)들 순국할 제, 피묻은 한 마디 말
사람마다 다 죽으면 나랏일 누가 하랴
포고문 매찬 글 속에 힘을 묶자 외치고
다시 붓을 쥐고 왜(倭)의 정부에 글을 붙여
신의를 배반하는 저들을 꾸짖으며
동양의 큰 평화 위해 열 여섯 죄를 헤니라
의병을 거느리고 내장사로 구암사로
순창 땅 애달파라 원수 손에 사로잡혀
대마도 먼 감옥으로 어이 끌려 가신고
차라리 죽을망정 왜(倭)의 쌀로 배불리랴
물인들 한 모금을 목 너머로 넘길소냐
상소문 동지께 전하고 굶어 돌아가시니
그 유해 바다 건너 고국땅에 대인 뒤로
정산(定山) 길 열 닷새를 거리마다 통곡소리
항쟁의 칠십 사 년을 원한 속에 마치니라. (주석 3)
주석
1> 윤병석, 앞의 책, 100쪽.
2> 최병상, <충효의 겨레사랑의 일월>, <나라사랑> 제6집, 96쪽.
3> <나라사랑>, 제6집,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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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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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압송... "내가 왜 왜병감옥에 갇히느냐" 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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