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피체지라는 설명문이 길가에 덩그러니 서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김상기
통감부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고종을 움직여 의병 해산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고, 조선군 진위대를 동원하여 의병의 활동을 봉쇄하려는 전략을 폈다. 이른바 '이이전략'이었다. 의병을 이끌고 장성으로 출발할 때 척후병의 보고에 왜군 수백 명이 산 숲속에 잠복해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왜군이 아닌 조선의 진위대 병력이었다. 면암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동족상잔이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전투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진위대 측에 통첩을 보냈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낼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살상을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대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렇게 한다면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면암집>)
면암의 통절한 호소에도 전주·남원의 진위대는 일본군과 함께 1일 오후 6시경 군사를 움직여 의병을 포위하였다. 중과부적이었다. 면암은 의병들에게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들은 모두 떠나 후일을 도모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의병이 22명이었다.
이튿날 면암을 비롯한 의병 13인은 진위대에 체포되었다.
<황성신문>의 보도이다.
전북관찰사 한진창씨가 작일 정부에 전보하되 전주진위대가 12일에 순창군에 이르러 하오 5시에 최익현·임병찬 등 13인은 생금(생포)하고 여중(나머지)은 개산(해산) 하였는데 병정과 인민을 병무일상 이으니 (이상 없으니) 생금 제인을 어떻게 조처할지 즉시 회교하라 하였는데 답전하되 최·임 등 제인은 엄수하고 사핵(조사) 상보하라 하였더라. (주석 2)
면암은 구인이 되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대처하였다.
이날 밤 최익현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한 일본인이 통역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최익현은 일어나 앉아 정색하며,
"너는 누구냐?"
하고 호통을 치자, 통역은
"광주 고문관 쓰나시마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최익현은 소리를 높여
"왜놈이 무엇 때문에 왔느냐?"
하고 물었다.
"어르신네께서 임의로 각 읍 창곡(倉穀)을 끌어낸 것은 어떤 까닭입니까?"
"너는 대한국 최참판이 의병의 맹주인 것을 몰랐느냐? 내가 내 나라 곡식을 방출하는데 너 왜놈이 무슨 상관이냐?"
최익현은 이렇게 꾸짖었다.
23일(양력 6월 11일) 전주의 진위대 소대장 김회진이 찾아와,
"황상의 칙지에 압송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대감께서는 길을 떠나셔야 하겠습니다."하고 최익현을 부축하여 창·칼과 협낭을 끄르려 하였다. 최익현은 "네 놈이 바로 이토오·하세가와의 심부름꾼이냐? 오직 놈의 심부름꾼이냐? 역적 놈들이 강제로 받아 낸 것을 감히 황상의 칙지라고 빙자한단 말이냐?"하고 꾸짖었다. (주석 3)
주석
1> 박민영, 앞의 책, 176~177쪽.
2> <황성신문>, 1906년 6월 14일.
3> 김의한, 앞의 책,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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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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