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여성들의 무연고 무덤, 동두천 상패동 공동묘지
임성용
춘자, 순자, 연자 영애, 명희, 수지, 허니, 릴리, 로즈...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들이 있다. 김소월 시인의 절창 '초혼'에서도 대답 없는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허공 속에 헤어진 이름을, 사랑하던 그 사람의 혼을 절규하듯 부른다.
성이 무언지 알 수 없는 춘자는 고향이 어디였을까. 순자가 사랑하다 죽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연자는 어찌 하여 기지촌으로 흘러왔을까. 영애는 왜 독한 여자가 되었고 매일 술에 취해 멍해졌을까. 거리를 떠돌며 몸을 팔던 어린 명희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클럽에서 일하는 수지와 허니는 얼마만큼 돈을 모았을까. 릴리는 미군과 결혼해서 꿈에도 원하던 아메리카로 갔을까. 소식도 없이 버림받은 로즈가 떠난 곳은 상패동 공동묘지일까. 그곳이 그녀의 집이었을까.
햇볕 없는 삶을 살다 짓밟힌 청춘, 꿈, 희망, 사랑, 가족... 그 모든 것을 짐승 같은 놈들에게 빼앗겨버리고 영영 안식할 수 없는 묘지에서, 수풀 우거진 산비탈에서, 그 어둡고 깜깜한 땅 속에서, 로즈가 울고 있다.
로즈를 찾아야 한다. 로즈의 이름을 찾고 고향을 찾고 얼굴을 찾아야 한다. 나의 누이여! 누나여, 언니여, 동생이여, 형제여!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이여! 누가 로즈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는가?
로즈는 죽지 않았다. 살고 싶어 부른 그녀의 노래는 꽃이 아니다. 시도 아니다. 꽃과 시는 똥이다. 세상의 모든 꽃은 세상의 꽃밭을 향해 던져야 하는데, 세상을 독차지한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세상에 꽃을 가둔다. 그것은 돈이라는 꽃이다. 로즈에게 향기를 다오. 사람이라는 꽃을 피워다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자여. 시를 쓸 때마다 당신의 똥냄새가 나지 않은가? 더러운 것, 숨기고 싶은 것, 부끄러운 것, 온갖 치욕과 거짓과 역겨움을 토해내는 것, 그렇게 말끔히 게워낸 구토와 오물이 시가 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쓴단 말인가? 당신 아닌 천사들의 삶을 시로 생각하라.
포주와 업소와 한편이 된 경찰
로즈는 기지촌 골목에서 미군에게 장미꽃을 팔았다. 몸도 팔았다. 아, 미군에게 살해당한 윤금이도 부족한 방세를 메우려고 꽃도 팔고 몸도 팔았다지. 로즈는 시를 좋아했다.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그러나 시인이 되지 못하고 '깔보'가 된 로즈가 불쌍하다. 일찍 죽어 더욱 더 불쌍하다. 차마 로즈가 말 하지 못한 로즈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가시덩굴에 찔린 수많은 로즈들이 있지만 내가 아는 로즈는 열다섯 살이었어. 앞서 얘기했다시피 고향도 성도 이름도 몰라. 어느 먼 남도의 시골에서 돈을 벌러 서울로 올라왔다고 해. 로즈는 직업소개소에서 알선해 준 다방으로 갔대. 동두천에서 가까운 연천이었다는데, 다방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취직을 한 셈이었지.
그러나 군부대가 밀집한 그곳 다방은 커피나 따라주는 곳이 아니었어. 만으로 열넷 먹은 로즈가 오빠뻘, 삼촌뻘, 아버지뻘 남자들에게 시달린 일이야 말해 뭐하겠어. 로즈는 못 견디고 다방을 나가려고 했다는데 다방 주인이 로즈를 좋은 일자리 알려준다고 데려간 곳이 동두천 기지촌이었대. 그래, 로즈는 다방 주인에게 기지촌으로 팔려 갔던 거야. 미군 클럽에서 로즈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이 되고 말았어.
도망치려고 했다지. 그러나 업주에게 이미 빚을 씌워 묶인 몸이라 쉽지 않은 일이었대. 그러다 클럽에서 어찌 도망쳐서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대. 경찰이 당연히 도와줄지 알았는데, 경찰은 로즈를 다시 포주에게 넘겨버렸대. 그게 당시에 포주와 업소와 한편이 된 경찰이었대.
또 다른 로즈는 어린 로즈보다 나이가 많은 스물셋 언니 로즈도 있어. 그녀는 이름도 사연도 좀 알려졌어.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로 불린 '김연자'야. 왕언니는 자전 에세이를 쓴 책을 펴냈거든. 그녀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
그녀 말에 따르면 동두천 기지촌에는 거의 사천 명이 넘는 여자들이 있었대.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이천 명, 거리에서 미군을 불러 몸을 파는 윤금이와 같은 '히빠리'들이 이천 명이었대. 한 기지촌에 사천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니! 동두천 경제가 이 여성들로 인해 성장했다는 것은 과장된 게 아니었지. 그때 성매매 업소를 운영했던 포주들은 모두 큰돈을 벌었다지. 딸 같은, 자식 같은 애들과 처녀들을 데리고 매춘을 시켜서 땅 사고 건물 사고 부자가 되었다지. 그 포주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 동두천시는 성병에 걸린 기지촌 여성들을 잡아다가 강제수용한 '성병관리소'를 하루 빨리 없애려 하고 있어. 1996년 폐쇄된 성병관리소가 소요산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30년이 다 되도록 방치된 그 건물이 흉물이라고 철거하려는 거야. 자국의 여성들을 매춘으로 내몬 정부가 성병관리소까지 만들고 운영했으니,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 노릇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성병관리소를 역사 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철거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나섰어. 동두천 시청과 시의회에 성병관리소에 대한 역사적 상징성과 역사 문화에 대한 활용 방안을 전했지만, 기어코 철거를 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어.
왜냐면 성병관리소가 있는 곳이 '소요산관광지 확대개발사업'(소요산 일대 60만㎥를 앞으로 10년간 개발할 예정이고 대략 3700억 이상의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한 사업)의 핵심 부지라는 거야. 여기엔 '동두천 지역발전 대책위원회'라는 단체가 철거를 주동하고 있어. 이들은 상인연합회, 자유총연맹 등 동두천 지역 내 수백 개의 단체들이 모여 있어서 그 힘이 막강하다고 해. 성병관리소 철거에 대다수 시민들이 찬성한다는 동두천 시청의 말은 정확한 여론이라고 볼 수 없어. 그들이 말한 '시민'이란 곧 지역발전대책위와 같은 사람들의 집단이야.
그들은 성병관리소 보존 운동을 하고, 일인 시위를 하고, 천막 농성을 하는 똑같은 시민인 우리들에게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 무조건 동두천 출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외지인들이 와서 보존하자는 것이라고 악선전을 하고 있어. 그들은 당사자인가?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는 전국적 연대체이며,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은 동두천 사람은 물론이고 의정부, 연천, 양주, 포천 등 인근 지역 사람들이야.
천막농성장 앞 도로 청소를 하던 청소 노동자도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나도 철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바로 시민들의 여론인 거야. 장삿속과 개발 이득에 눈이 먼 사람들과 정치적 결속으로 엮인 집단의 철거 주장은 무언가 악행을 저지른 악인들이 그 행위를 숨기고 지우려는 수작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