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실적 향상의 압박이 더해졌고, 욕설이나 폭언을 들어도 전화를 끊지 못해 전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리고 제풀에 끊기를 바라는 날들이 늘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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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유지를 위해 각종 일자리를 떠돌던 20대 끝 무렵, 나는 한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상품 상담이 주력 업무였던 터라 점심시간을 누릴 틈도 없이 전화를 받고, 방문 고객의 대면 상담까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적 향상의 압박이 더해졌고, 욕설이나 폭언을 들어도 전화를 끊지 못해 전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리고 제풀에 끊기를 바라는 날들이 늘었다. 폭력성 전화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지쳐가는 나는 전화기 앞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길어졌고, 출근길에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자, 상담이라도 받아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단단히 마음먹고 방문한 정신과에서는 심각하다는 소견과 함께 약 봉투가 돌아왔다. 이렇게 된 이상 생각만 했던 노무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내 상태가 '재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시간, 계단참에서 심호흡 끝에 1577-2260을 눌렀다. 잠깐의 신호음이 지나고, 애써 떨림을 누르며 "비정규직도 산업재해 신청이 될까요?"라고 질문하자, 밝은 목소리가 답했다. "그럼요! 좀 더 상세한 상담을 위해 방문할 수 있으시겠어요?" 방문을 결정하고도 약간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방문하니 나를 최대한 배려하는 마음이 돋보였고, 비전문가의 시선에서 세세히 설명하려 노력해 주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7개월짜리 계약직이 산업재해 신청을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일을 그만두고 다른 정규직에 취업하지. 행여 이 일로 다른 자리마저 취업이 안 되면 어떡하냐'는 걱정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이 사건을 포기했다. 한계를 넘는 상황임을 인정하고, 포기 의사를 밝히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 곳도 비정규직에게는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일이 있을지 성찰하게 되었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나와 같은 이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했다. 지금껏 고민했던 장래에 대한 문제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바로 공인노무사가 되어 노동현장의 해결사로 활동하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이 거친 여정 위에서 희망을 찾았다. 누군가 같은 곤경에 처했을 때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전문가로, 노동의 내일을 안내하는 등대가 되길 소망한다.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다
'노동'에 발을 디디겠노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내가 가진 것은 온통 토막 난 경력으로 가득한 이력서였다.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관련 쟁점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껏 거쳐온 모든 기업이 그랬듯이 기회조차 주지 않고 탈락시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걱정과는 달리 연락이 오는 곳이 있었다! 상담했던 본부에서는 경력직을 구하고 있어 자격이 되지 못했지만, 인연이 되지 못함이 아쉬워서 전화를 걸었다며 짧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 늦가을, 민주노총을 조사하며 중소·영세·비정규직이 모인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곳이라면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도 뭉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원서 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며칠이 지나고 원서를 썼던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민주일반연맹'에서 후보 세 명 중 한 명이 되었다며 면접 연락을 주었다. 기쁜 마음에 날이 새도록 면접 준비를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울행 버스에 올라 본부가 위치한 아현역까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회의실인 면접장에는 빨간 플래카드가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고, 세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애써 떨림을 누르며 자기소개를 한 후, 지원동기와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내가 사는 도시의 환경미화원 직고용 투쟁과 시청 앞 농성을 보았던 경험을 이야기하자 당시 비대위원장님이 '그거 내 작품이야!'라고 하시며 좋은 반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합격을 알리는 전화였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상의 사람이란 쓰다가 시간이 지나면 버려지는 부품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버려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세상에서의 시작이었다.
그해 혹독한 겨울, 마음만은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