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제분 노동자들에게 교육하는 정진동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노동조합 설립 6개월 전부터 정진동과 신흥기업 노동자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진동은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조합원의 자세, 일상 활동에 관한 교육을 했다. 노동조합이 산별 체계였기에 한국노총 화학노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노총은 도시산업선교회를 '불순 세력'으로 규정하고 적대시했다.
정진동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이완우, 김태안과 함께 화학노조 본조로 올라갔다. 노동조합 설립과 관련해 실랑이가 있었지만 본조에서는 작업복을 입은 정진동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본조로부터 노동조합 설립 권한 위임장을 받고 내려온 이완우는 사측과 창립식 장소를 교섭했다. 하지만 신흥기업(신흥제분)이 어떤 곳인가? 절대 불가였다. 할 수 없이 창립식 장소를 청주산선으로 정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본조 간부들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펄쩍 뛰었다. "왜 하필 산업선교회요!" "회사에서 장소를 빌려주지 않는데, 여기 목사님이 빌려준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본조 임원들은 장소를 옮길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그렇게 해서 옮긴 곳이 평화여인숙이었다.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식은 원만히 이뤄졌다. 1975년 4월 19일의 일이었다. 이완우가 분회장으로 선출되고 임원 회의를 할 때였다. 본조 임원이 "정진동 목사님을 모셔 오라"고 했다.
한국노총과 도시산업선교회가 불편한 관계인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지역에서 노동조합의 운영과 관련해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나타난 정진동을 보고 본조 임원들은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서울 본조로 올라온 허름한 작업복을 입었던 이였기 때문이다. "목사님.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당신 같은 남자들 때문에...
노동조합이 설립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였다. 아침 일찍 출근한 이완우 분회장은 기절초풍했다. 생면부지의 회사 간판 때문이었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소속 회사인 신흥기업이라는 간판은 온데간데없고, '삼진기업'이라는 낯선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도급 계약기간이 끝나서 삼진기업과 새로 계약을 맺었소." 이완우의 질문에 신흥제분 관리자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는 사측의 행태였다.
이완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전국화학노조 삼진기업분회'로 노조 명칭을 변경했다. 이어서 사측에 8시간 노동에 임금 1000원, 잔업수당 실시, 유급휴일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회유 전술로 나왔다. 금전 공세로 노동조합 와해를 기도한 것이다. 당시 집에 쌀 살 돈이 없던 이완우는 20만 원을 받고 사측에 약정서(각서)를 써줬다.
"본인은 삼진기업 분회장으로써 운영상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로 인해 분회를 해체코자 하오니..." - 1975.9.12. (<노동현장과 증언>, 1984, 풀빛)
분회장 이완우와 삼진기업 홍열표 대표 간에 이뤄진 약정서였다. 사측에 약정서를 건넨 이완우는 점퍼 안주머니에 20만 원을 넣고 내덕동 집에 왔다. 동네 구멍가게로 쌀을 사러 갔다. 그런데 막상 쌀을 사려고 하니 정진동 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결국 쌀을 사지 못했다.
삼진기업 노동조합이 현판식을 하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아무런 기미가 없음을 이상하게 여긴 건 조합원뿐만이 아니었다. 정진동이 내덕동 달동네로 갔다. 정진동이 사정을 묻자 이완우가 울음을 터뜨렸다.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쏘아붙였다. "당신 같은 남자들 때문에 신흥제분 부인들이 고생하는 거예요. 차라리 칼을 물고 죽어요" 이완우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정진동은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돈을 돌려주세요. 그리고 각서를 꼭 돌려받으세요."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던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이완우는 노동조합 지킴이 활동을 더욱 헌신적으로 했다.
폭망
정신을 차린 이완우는 사측과 1975년 단체교섭을 체결했다. 그런 후에 기본급 인상,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준법투쟁에 들어갔다. 사측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75년 11월 15일 노조 간부 12명을 전원 해고했다. 사측은 이 조치 후 열흘도 채 안 돼 이완우를 포함한 노조 간부 6명을 선별 복직시켰다.
정진동과 기독교계는 신흥제분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규탄 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이완우와 노동조합 간부가 복직되자 '복직 환영 예배'를 드렸다. 1976년 1월 24일 청주산선에서 열린 환영 예배에는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구호가 넘쳤다.